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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중훈 “삶의 노래, 고향의 노래, 4.3의 노래에 혼을 다했다”
강중훈 “삶의 노래, 고향의 노래, 4.3의 노래에 혼을 다했다”
  • 서연실 기자
  • jeju@newslinejeju.com
  • 승인 2019.01.12 11:4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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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문인들](2)성산포를 품은 시인 강중훈
“터진목 대학살, 유년의 기억 아직도 눈에 선해”
“시인의 마을, 오조리 조성 위한 노력 다할 것”

세상을 보는 눈은 다양하다. 아름다운 풍광을 가진 제주를 보는 눈도 그럴 것이다. 제주 사람들의 후한 인심, 천혜의 자연이 빚는 모양은 어떤 모습들일까? 예술가들, 특히 이 땅의 문인들은 제주를 어떻게 보고 표현하고 있을까. 또한 그들이 사유하는 바를 어떻게 옭아내고 있을까. 영주일보가 특유의 문학적인 감각과 감성으로 새롭게 창조되는 제주, 제주인들의 정신세계를 이끌어가고 있는 제주문인들의 문학세상을 엮어 본다.[편집자주]

강중훈 시인
▲ 강중훈 시인 @뉴스라인제주

분노 섞인 달빛이 목에 칼을 들이댄다.
나는 죽음에 관한 믿음에 유서를 쓴다.
목 잘린 시신이 서산 끝에서 간당간당 흔들릴 때
누군가는 마냥 침묵하고 있었다.
무자년 그해,제주의 사월은 침묵도 소화하지 못한 체
육십년 세월 천식을 앓고 있다.

- 강중훈 시 ‘천식’ 전문

“시는 내 삶이며 내 고향”이라고 말하는 시인, 있는 그대로의 고향, 오조리를 살고 있는 시인, 아직도 4.3이 안겨준 회한을 천식처럼 앓고 있는 강중훈 시인을 만났다. 어쩌면 강중훈 시인은 4.3 때 죽음 직전에 “이발하러 다녀오마”라며 올레를 나서던 아버지를 아직껏 목을 늘여 기다리는 소년일지도 모를 일이다.

아! 고구마가 다쳤네.
피가 흐르네.
얼마나 아플까.
얼른 닦아줘야겠다.

-강중훈 시 ‘칼’ 전문

강중훈 시인이 중학교 1학년 때 국어 작문 숙제로 제출한 작품이라 한다. 고구마를 캐고 있는 어머니의 일손을 거들다가 배가 고파 고구마 껍질을 벗기는데 그만 손가락을 베어 피가 나자 고구마 속살까지 피로 물든 모습을 그린 것이다. 시라고는 전혀 모르던 시절에 선생님께 들었던 칭찬이 아직까지 보관하고 있는 낡은 일기장에 고스란히 남아 추억하게 만든다고.

강중훈 시인은 서귀포시 성산읍 오조리 출신이다. 하지만 1941년생인 강 시인이 태어난 곳은 일본 오사카이다. 해방을 앞둔 1944년에 부모님을 따라서 귀국해 제주에서의 삶을 시작했으나 그로부터 불과 몇 년 후에 발생한 4.3으로 인해 끔찍한 일을 겪어야 했다.

성산일출봉 앞 ‘터진목’ 학살에서 살아남은 이야기다. 4.3으로 인하여 460여명이 죽은 성산읍, ‘앞바르 터진목 대학살’ 그 현장에서는 강 시인의 아버지와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의 형제자매·사촌형제 등 12명이나 희생됐다.

당시, 고작 초등학교 1학년이던 강 시인은 그 광경을 어머니와 자기보다 어린 누이와 두 살 손위 누나와 지켜봤다. “저렇게 죽는 것이구나”라는 느낌뿐이었다고 말한다. “슬픔이란 걸 몰랐는데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그것은 어린아이가 받은 엄청난 충격이라 할 수 있다”라고 회상한다.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가 이런 게 아닐까.

초등학교 운동회 날
아이들은 모두 아버지 손을 잡고 달리는데
나는 하릴없이 높아진 하늘을 바라보다가
아버지가 떨어뜨리신 구름 한 조각을 잡고
혼자 달렸다. 그 운동장이 너무 넓어 울며 달렸다.

- 강중훈 詩 ‘구름 한 조각 손에 쥐고 혼자 달렸다’ 전문

운동회 날 ‘아버지 손잡고 달리기’ 쪽지를 뽑아 들었어도 자신에게는 아버지가 없다고, 순진하게 혼자 달려서 등외가 되었던 기억이 가슴에 아리고 슬픈 추억으로 자리하다가 시 작품으로 탄생했다.

하지만 “(4·3이) 그렇게 비참함을 안겨주고 아픔을 안겨준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하고 말한다. 그래서 고향을 지키면서 시인으로 살아올 수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시인이 살아온 굴곡진 세월, 그 사연을 다 말하고 적으려면 대하소설감이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남들이 다 가는 고등학교 진학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제주시에 있는 우생당 서점 점원으로 갇혀 지내면서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섭렵하는 특권을 누렸다. 세계명작이라는 명작을 모두 읽은 게 그 시절의 일이다.

강중훈 시인
▲ 강중훈 시인 @뉴스라인제주

열일곱살 되던 해인 1958년에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로 무작정 올라가 돈이 되는 일이라면 어떤 일이든 마다하지 않고 온갖 고생을 다하며 근로청소년들을 위한 고등학교에 적을 두고 학업에도 힘썼다.

졸업반이던 1960년에는 4.19가 일어나기도 했으나 강 시인 자신이 결핵과 신경쇠약증 등을 앓게 되어 몸과 마음이 피폐해져 낙향했다. 그런 중에도 다행스러운 일은 제주에서 고등학교(중앙고)를 마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또, 당시 전도학생백일장에서 대상을 받는 영광을 안으면서 제주대 교수로 계시던 양중해 시인과의 만남이 이뤄진 것은 너무나 크나큰 행운이었다고 회상한다. 1년여간 양중해 시인에게 지도를 받으면서 문학도로서 꿈을 키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학에 대한 강 시인의 그러한 열정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고향에서의 삶이 버겁다고 느낀 강 시인은 일본으로의 탈주를 기도했다. 운명인 듯 이 역시 여의치 않았다. 시인이 어렵게 얻어탄 밀항선은 태풍주의보로 뱃머리를 돌리고 말았다. 이후 부산에서의 자살 기도 실패 등 절망의 나날이었다. 이러한 좌절의 일상에서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분은 항상 강 시인의 어머니셨다. 강 시인은 “어머님은 나에게 절대적인 신앙의 대상이었다”고 술회한다.

스물여섯에 어머니가 짝 지워주는 색시와 혼례를 치렀다. 어머니를 모시고 효도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일념 때문이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닥친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9급 공무원시험에 응시했고, 합격통지서를 손에 쥔 때가 스물여덟살이었다.

당시 심정에 대해 강 시인은 “다소 늦은 나이였으나 결코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나 자신 존재의 의미를 공직자로서, 또한 국가의 공복으로서의 성실성에 두었으니까요. 그 직무에 최선을 다하는데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 존재의 의미와 직무를 다하기 위해 문학수업은 접기로 했을 정도였거든요”라 술회한다.

그런데 그는 어떻게 해서 다시 시인의 길을 새롭게 걷게 된 것인지 궁금증을 더하게 했다. 강 시인이 제주도청 과장직에 오르던 1993년, 쉬흔셋의 나이였다. 나이와 직위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여유를 갖게 했다고 한다.

아무렇게나 버려두었던 시편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 직장 동료이며 이미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오승철 시조시인의 마음씀과 도움이 절대적이었다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강 시인이 문단에 이름을 올리게 된 공의 8할은 오승철 시인 덕분이라는 것이다. “그는 나의 재능에 불을 지펴주는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헤일 수 없을 정도로 내 작품을 보고 평하며 밤을 지새면서까지 함께 고민해주었거든요. 그렇게 해서 정리된 ‘오조리의 노래’ 등 10편의 시편들이 계간문예지 「한겨레문학」 창간호에서 신인상을 받게 된 것이니까요”라고 덤덤하게 말한다.

“이때 당선소감에는 내 나이 오십 줄, 따지고 보면 ‘인생의 가을’이라고 해도 좋을 듯한 가을의 길섶에서 용서를 해 줄 것이 있다면 다 용서해주고, 또 용서를 구할 것이 있다면 다 구하고 싶다고 썼습니다”

내 고향 오조리 봄은
바당애기 혼자
집을 지킨다

얼마나 외로우면 소라껍질에 뿔이 돋는가
그 뿔에
송송
젖 부른 어미의 숨비질이 뜨는가

왜, 바당애기는
“아버지”란 소리 한번 못해 봤는지‘

말하지 마라
말하지 마라
반평생
호-이 호-이

숨비질 소리만 질긴 뜻을
말하지 마라

제주도의 사월 바람은
거슬러 날라오는 소리개의
발톱

돌담 너머
수평선 푯대 끝
그 이름은 아직도 숨을 죽인다

내 고향 오조리는
소라껍질 같은
가슴이 빈 사람들만
답답한 봄을 맞는다

-강중훈의 시 ‘오조리의 노래’ 전문

강중훈 시인
▲ 강중훈 시인 @뉴스라인제주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고향 오조리에 정착하게 된 이유는 어떤 것일까. “30년 공직 생활을 마감하던 2000년에 돌아왔는데요. ‘해뜨는 집’, 이 자리는 제주4.3 때의 집단학살 터 ‘앞바르 터진목’을 바로 마주보는 자리예요. 저는 그곳을 바라보면서 늘 겸손하려 하고, 늘 성실하고 싶고, 늘 사랑하며 살고 싶어서”란다.

이곳을 찾아오는 시인묵객들과 끝없는 대화를 나누고 정을 나누는 일이 강중훈 시인의 일상이다. 그 가운데 2008년도 노벨문학상으로 빛나는 문호, 프랑스 작가 르 클레지오와의 인연은 참으로 소중한 것이다. 강 시인과의 깊은 대화를 통해 제주해녀의 삶, 제주4 3의 아픔 등에 대해 깊이 이해하게 된 르 클레지오는 해마다 제주 오조리 ‘해뜨는 집’을 찾아서 묵고 강 시인과는 형제의 정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강중훈 시인의 말씀을 들으면, 오조리는 풍광이 빼어날 뿐만 아니라 인문 자원 역시 다양하게 분포한 마을이다. 시인으로는 600년전 오조리에 대해 ‘나를 비추는 마을’이라 표현했던 한학자 오봉조 선생이 우뚝하다.

특히 성산읍 오조리는 문인들이 많이 들어와 거주하는 마을이기도 하다. 이 마을을 우연찮게 방문했다가 아름다운 풍광에 매료되어 눌러 산다는 이병률 시인이라든지 성산포를 즐겨 노래한 이생진 시인 역시 한때 식산봉 중턱에 2년쯤 거처하기도 했다.

강중훈 시인은 “지난 2016년도부터 제주도문화창의연구회를 설립해 이곳을 중심으로 전시와 공연예술 등을 진행하고, 시 발표회와 토크콘서트 등을 열면서 문화예술이 살아 있는 마을로서 꾸준한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라고 전한다.

오조리 마을 이름에 대한 소개 또한 새롭다. “‘오조리(吾照里)’의 ‘吾’는 나를 뜻함이며 ‘照’는 ‘비춰준다’, ‘비춰본다’라는 뜻이 함축된 한자어라는 것. 바로 오조리는 그런 의미에서 ‘나를 비춰봄’, 즉 양심이 살아있는 ‘명경(明鏡)마을’이기도 하다”고 설명한다. 나를 비쳐보는 마음이 곧 시인의 마음 아니겠느냐는 것. 강중훈 시인의 시에는 온통 ‘오조리’로 가득하다.

강중훈 약력

1941년 일본 출생.
1993년 <한겨레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해 서귀포문인협회 회장, 제주문인협회 회장, 계간문예지 <다층> 편집인,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제주지역위원회 회장 등을 역임

제11회 제주도예술인상, 제17회 제주문학상 수상
(현)제주도문화창의연구회 회장

시집『오조리, 오조리, 땀꽃마을 오조리야』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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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희주 2020-07-10 20:56:12
고등학교 시절을 오조리에서 보냈던 제게는 추억의 창고 같은 곳입니다. 감사합니다.
강중훈 선생님의 초청을 받고 한 여름밤 함께 식사를 나누었던 것도 또 한 장의 추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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