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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태식 칼럼](39)친절한 누님
[현태식 칼럼](39)친절한 누님
  • 영주일보
  • jeju@newslinejeju.com
  • 승인 2015.07.15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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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태식 전 제주시의회 의장

 
그런데 내가 은사님이 경영하는 신문사 지사에서 바둥대며 근무하면서도 제일금융주식회사 수금사원으로 일수돈 장사도 나의 업무로 겸하고 있었다. 선생님의 누님이 ‘호수장’이란 요정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 요정 색시들이 일수 돈을 쓰니 그 요정에 수금하려고 하루에 한번 이상 들락거릴 때의 일이다.

나는 행색이 남루하기 그지 없었다. 말하기 창피하지만 사실이 그랬다. 나는 정릉 골짜기에서 막노동하다 몸이 붓고 병이 심하여져서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부모님 슬하로 돌아와 있을 때였다. 눈총은 많이 받았지만 다른 도리가 없었다.

외출할 때 입을 옷이 마땅치 않아 어머니께 외출복을 부탁했더니 “너의 형들은 다 자기대로 벌어서 사 입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가진게 없으니 별 수 없었다. 노동자 시절에 입었던 것을 입고 직장을 다녔다. 이따금 등 뒤로 완전히 찢어져 이것을 누빈 재건복이 있었는데 이 옷도 번갈아 입었다. 차림새가 이런 정도니 술집 색시가 나를 보면 참으로 한심해할 것은 불문가지다.

어느날 마담이 나를 보고 ‘동생’ 하고 부르는 것이 아닌가. 너무나 포근하고 반가운 말이다. 사람들 중에도 이런 사람도 있는가 하고 속으로 얼마나 감사해하고 기뻐했는지 모른다.

“예, 누님” 하고 대답했더니 “동생이 다니는 것을 보니 불쌍해서 내가 도와주어야겠어”

순간 내가 살아있는 것인가 꿈이 아닌가 하고 내 귀를 의심하였다. 아무도 돌보아주지 않은 외면당한 내가 아닌가. 하루하루 겨우 목숨이 붙어있는 나를 도와주신다니 아! 구세주여. 마음 속으로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마담이 그 다음 나온 말인즉 ‘밀수품을 취급하는데 이익이 많이 남는다. 그러나 자본이 모자라 물건을 많이 사지 못하니 5만원만 가져오면 그 돈으로 장사해서 남은 이익을 다 주겠다. 매일 수금하러 다니는 것을 보니 참 어렵고 딱한 것 같아 도와줘야 하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눈물겹도록 고맙지 않은가. 그러나 5만원을 어떻게 구하나 막연하였다. 나는 그 때 신문사 일을 해서 일천원, 호수장 집 딸 가정교사 해서 일천원, 그래서 월 2천원을 받고 있다가 돈장사로 직장을 바꾸고나서 몇천원 월금을 받고 있었다. 이 돈으로는 근본적인 병도 치료하지 못할 만큼 궁색한 처지에 있는 나를 도와주겠다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결혼한 지 15일만에 신혼의 단꿈도 미처 모른 신부를 두고 군대에 입영했던 허약한 남자, 이런 천덕꾸러기같은 나를 도와주겠다니 너무 고마운 일이라 감격하고 있었다.

그러나 5만원이란 거금을 어떻게 변통할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마침 제주중학교 정문 곁에서 ‘서울금융’이란 우리 회사와 동종 업체가 있어 마침 들렀는데 이 회사의 박군인 사장님이 내게 들려주시는 말씀이 우리 어머니께서 돈을 맡기시면서 아들인 나에게는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하셨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나는 어머니께 “박군인 사장에게 빌려준 돈 찾아다 차용해줍서. 이자를 어기지않고 갚으쿠다”하고 말씀했더니 돈을 찾아다 빌려주셨다. 차용증을 정확히 써드리고 돈을 가져다 마담 손에 쥐어주면서 부탁했다.

“이 돈은 내 생명과 같습니다. 누님, 나를 꼭 살려주십시오. 그 은혜는 내가 살아있는 동안 잊지 않겠습니다”
“아따, 걱정 말게. 내가 동생을 얼마나 좋게 봤으면 이러겠나. 잘 도와주겠어. 빨리 성공하게”

나는 살판이 났다 싶었다. 일주일에 5천원, 한달에 2만원 수입, 한달에 이자를 일천오백원씩 지불해도 일만8천5백원 수입이 될 게 아닌가. 직장에서 받는 월급의 대여섯 배를 버는 것이다. 곧 부자가 되겠다. 아니 이런 세상도 있는가 생각하니 푸른 하늘이 한층 더 아름다웠다.

일주일이 되니 정확히 5천원을 받았다. 아내에게 자랑스럽게 가져다 주었다. 이제 살 길이 열렸다 싶었다. 다시 또 일주일이 되고 하루가 넘어도 5천원 준다는 말이 없어 기다리는데 하루가 여삼추다. 다음날 마담을 찾아 ‘누님!’하고 불렀더니 “방으로 들어오게. 내가 너무 바빠서 깜빡했어” 고마운 누님은 돈가방을 탁 열어보이며 5천원을 세어 주려다가 멈칫하더니 “오늘 물건이 많이 들어온다는데 돈을 채우다가 좀 모자라. 그러니 이 5천원도 함께 썼다가 다음 주에는 5천5백원을 줄께” 하면서 종이에 곱게 싼 남방셔츠 옷감을 하나 주셨다. 나는 더욱 감격했다. 돈을 벌게 해주고 옷감도 얻고 내가 얼마나 복이 많은 놈인가. 이런 누님을 만나다니 세상에 죽으란 법은 없구나! 나를 무시하는 사람들아, 두고보자. 얼마 안 있어 나도 ‘삐까뻔쩍’할 때가 있을거야.

보무도 당당하게 집으로 돌아와 혼자 분주해하는 아내에게 “이거”하고 내밀었다.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옷감까지 받았다고 으쓱해했더니 아내가 하는 말은 “이건 5만원짜리우다. 돈받긴 다 글렀수다”
“무슨 방정맞은 소릴 그렇게 해! 그럴리 없어. 그럴 누님도 아니고, 밀수품 장사가 얼마나 잘되는 장사인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가슴이 덜컥 하는 것이었다. 혹시 아내 말이 맞다면? ‘아니 그럴 리가 있나’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치는 불길한 예감도 떨칠 수는 없었다.

다음날 마담을 유심히 살펴봤다. 나의 경험 없고 인생을 모르는 눈으로는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너무나 태연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후 3일인가 지난 뒤 출근해보니 사무실 분위기가 심상치 않고 사람들이 뭣인가 술렁거리고 있었다. 사장님 말씀에 의하면 호수장 마담이 주인집 돈까지 갚지 않고 주변 여러 사람에게 빚을 얻어 엊저녁 부산행 배를 타고 도망갔다는 것이다. 장사장님이 해양경찰에 신고해서 부산 부두에서 하선할 때 그 마담을 붙잡아 제주로 오는 배편에 연행해오는 중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망했구나. 내 돈 5만원....” 나는 다시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심정이었다. 마누라의 예감이 이리도 맞을 줄이야.... 사색이 되어 집에 오니 “이번엔 돈 떼었지 예? 내가 뭐엔헙데가? 남방셔츠 옷감 가져올 때 난 알았수다”하는 것이었다. 앞이 캄캄했다.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벼룩의 간을 내어 먹지 목숨이 이제나 저제나 하며 처절하게 몸부림치는 나를 벗겨 먹다니.... 생각할수록 억울하였다.

그러나 쏟아진 물은 못 담는 법, 세상에 닳고 닳으며 살아온 마담에게서 무슨 수로 돈을 되돌려 받을 것인가. 다음날 경찰서로 가봤다. 마담이 초라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거기서 난동을 부릴 수도 없고 창피해서 서있을 수도 없고 용기가 없어 심한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우두커니 서있다가 그냥 나올 수도 없고 해서 “누님, 나는 그 돈 때문에 죽을지 모릅니다. 그런 돈을 가져간 누님은 행복하게 잘 살아야 합니다”는 말만 내뱉고 경찰서 문을 나서는데 눈물이 하염없이 내 볼을 적셨다. 사나이가 목놓아 울지는 말자. 의연하게 걸어가자. 스스로 다짐하며 비틀거리는 몸을 가누고 집에 왔다.

살 길이 막막했다. 하지만 어머님께 진 빚은 갚아야 한다. 이 돈을 갚지 못하면 자살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모질게 스스로를 다그친다.

아내와 상의했다. 처이모가 쌀장사를 하면서 계주(契主)를 하는데 거기 가입하고 첫 번째로 계금을 받기로 약속받았다. 곗돈을 타서 원금과 이자를 합해서 어머님께 가져다 올리면서 사기당한 말씀도 해드렸다. 어머니는 아무 말이 없다.

이 일로 인하여 3년을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아야 했다. 고생하며 사는 내 인생을 곱씹어 가며 생각해 보았다. 세상은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데 그 마담은 약한 나를 자기의 먹이로 택했고 나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미끼에 걸려든 것이다. 이익이 되는 것이라면 자기가 챙기지 피붙이도 아니고 고향 사람도 아니고 전부터 알던 사람도 아닌데 나를 도와줄 이유가 손톱만큼도 없는 것이다. 그의 솔깃한 말에 넘어간 내가 머저리, 병신인 것이다. 내 월급, 가정교사까지 해서 번 돈, 2년을 훨씬 넘도록 벌어야 모을 수 있는 돈을 선불하고 얻은 교훈은

· 비싼 이자 주겠다고 하면서 돈을 빌리려는 사람은 사기꾼이다.
· 까닭 없이 도와주겠다는 사람, 이익을 얻게 해주겠다는 사람은 상대하면 안된다. 이 함정에 또 빠지면 너는 죽어 마땅하다.

이 교훈을 가슴 속 깊이 골수에 새겨놓자. 그 이후로는 이유없는 이익이나 도와주겠다는 솔깃한 말에 넘어가 비싼 이자노름에 빠지거나 사기당해 파산하고 인간도 망가지는 비참한 일을 당하지 않았다. 정말 뼈가 으스러지게 노력한 결과만이 내 것이지 그 외의 것은 아무리 화려하고 좋아 보여도 나와는 상관이 없다는 생각으로 살아온 것이다. 그때 그 마담이 가르쳐준 것이 내 인생의 보약이었다. 내가 지금 그런 일을 당했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생각조차 하기 싫은 끔찍한 일이지만 그 후로는 사회통념보다 더 이익을 주겠다는 유혹에서 나를 보호하는 방법을 일찍이 배우게 된 것이다.

· 지나친 친절로 이익을 제의하는 자는 그 뜻이 다른 데에 있다.
· 나를 필요 이상 돕고자 하는 자는 나를 말아먹으려 하는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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