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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태식 칼럼](34)엎친데 덮친 고난
[현태식 칼럼](34)엎친데 덮친 고난
  • 영주일보
  • jeju@newslinejeju.com
  • 승인 2015.06.26 13: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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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태식 전 제주시의회 의장

 
생활은 점점 궁핍하였다. 나는 밥을 제대로 못먹는다. 소태먹은 것처럼 입맛이 쓰고 식욕이 없었다. 그러기 때문에 배 아픈 것은 알겠는데 배고픈 것은 잘 모른다. 밥을 입에 넣으면 목구멍에서 받쳐 내려가지 않는다. 그러니 오래오래 입에서 씹어서 죽처럼 만든 다음 내린다. 죽지 않기 위해서다.

남의 무남독녀 데려다 놓고 그냥 군대에 갔는데 그 사이 장모님까지 돌아가셨으니, 내가 죽으면 부인은 너무너무 안되었다. 나는 얼마 못살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고 동리 사람들도 다 태식이는 죽게 되었다고 수군대고 있을 때 내 아내는 나에게 시집와서 총각신세 면하게 해 준 것만도 얼마나 고마운가! 그리고 내 학비 마련에 가진 것 다 팔아버려서 저녁쌀을 걱정하고 있는데 나만 편안히 죽으면 아내는 혼자 거리를 방황하는 신세가 될 것이다. 정상인으로 살아가지 못할 것은 보나마나다. 결혼하고 금방 내가 군에 입대했으니 군대에 갔다오면 학비를 대어 주려고 부산까지 가서 제복공장까진 다닌 아내의 갸륵한 마음이 고마웠는데 중도에 장모님의 병환 때문에 귀향한 안타까운 사연, 그래도 나를 의지하여 살려고 제대증을 받게 해준 아내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를 “아버지로, 오빠로, 남편으로 생각하고 산다”고. 나 이외에는 아무도 없으니 더 보고 말고 할 데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니 나도 살기 위하여 노력을 해야 했다.

그래도 식량이 자주 바닥난다. 쌀 한말을 사오면 며칠 지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쌀(그것도 보리쌀)이 떨어져간다.

둘이 앉아서 한다는 소리가 “우리가 남들보다 배가 큰 것 아닌가? 쌀이 왜 이렇게 빨리 굴어?”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내가 다른 사람보다 삼분지 일도 안 먹는데.... 가난한 사람은 부자보다 더 배고프고, 더 부럽고, 더 비굴하고, 더 잘 토라지고, 더 기죽고 하는데 원인이 있었다. 가진 것이 없으면 마음마저도 궁기가 들어 그런 것이다.

아내는 부지런했다. 돈이 일원이라도 생긴다면 거짓말이나 도둑질 아닌 일은 다했다. 나도 밭에 가서 일을 했다. 그런데 시내로 나갈 수가 없다. 입고 신을 것이 없어서다. 결혼할 때 신었던 구두는 아버지께 드려버렸고 양복은 입을 수 없으니 버렸고, 장가간 뒷날 처갓집 어른들에게 인사드리로 갈 때도 입을 것이 마땅치 않아 검은 물 들인 작업복을 입고 처가 어른들께 인사다녀서 장모님 가슴을 아프게 했었다. 그때는 제대복과 제대화 뿐이니 그걸 입고 거리로 나갈 용기를 낼 수 없어서였다. 이런 걸 입어 밭에 나가 일은 했지만, 차마 그 차림으로 시내에 나들이하거나 경조사에 가 볼 수는 없었다. 갈 수야 있었지만 실은 용기가 없고 부끄러워 가지못했다. 그랬더니 몇 달 후 아내가 운동화를 사왔다. 그리고 털실을 구해다 뜨개질하여 조끼를 만들어 주었다. 내 친구가 노름판에서 잡힌 양복저고리를 가지고 와서 아내에게 “아주머니, 이 옷 사서 태식이 입힙서”하는 바람에 천이백원 주고 노름판 옷을 사서 세탁하여 입혀주었다. 아랫바지는 작업복을 입어서 나들이하였다.

그러나 변변한 직업을 찾아 나설 수 없었다. 건강이 워낙 나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시 겨울이 다가오는데 갈 데가 없다. 이러다간 길가에 나앉게 되었다. 지금 사는 집은 장모가 살아계실 때 세든 집이었고, 전세금은 처숙부에게 드리기로 하였으니 우리가 나가야 전세금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처가인 한씨댁 돈을 현씨인 내가 먹을 수 없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어거지를 쓰기로 했다. 어머니를 찾아 뵙고 형님들은 분가할 때 집을 주거나 집 얻을 돈을 주셨는데, 나도 이젠 갈 데도 없고 어차피 집에 들어와야 되겠습니다 하고 강경한 태도를 보였더니, 큰형님이 몇 년 사시다 집을 새로 짓고 이사해서 이제는 남에게 임대해주는 큰 길가 집의 방 하나에서 살아도 좋다는 허락받고, 이사해 들어왔다.

그런데 아뿔싸, 없는 놈, 안될 놈은 뒤로 자빠져도 코 깨진다는 옛말이 그른 데 하나 없는 것 같다. 이 집은 부두에서 하역업체에 관여하여 내로라 하고 사는 오윤옥씨의 밭을 삯내어 4·3사건에 헐벗고 갈 곳 없는 사람들이 집을 지어 사는 곳인데, 부모님도 여기에 참여해서 백부님과 같이 삯을 내어 북쪽 편에는 백부님께서 집을 지어 사시고 아버지께서는 남쪽 편 한길가 60여평에 12평짜리 집을 지었다. 이 집에 큰형님 여러 해 사셨다. 땅세는 현물로 갚는데 철 따라 봄에 보리 여덟 말, 가을 추수 때 조 여덟 말을 지주에게 내 놓았다. 이 집에 이사온 봄부터 앞마당이고 어디고 이 손바닥 만한 땅이 있는 곳에는 야채를 심어서 자급자족하려고 계획을 세웠다. 봄철이 되니 앞서 세들었던 사람이 앞마당에 심은 마늘이 풀마늘로 먹을 만하게 자랐다. 그 사람에게 뽑아가라고 하였더니 씨마늘이 돼야 뽑아 가겠다는 것을 잘 타일러 뽑아가게 하고 이 집에서 살았다.

이 땅세를 내가 내야 하게 되었다. 어디 땅세를 갚을 곡식이 있나? 걱정이 태산같았다. 시간이 지나 초여름이 되니 보리를 수확했다. 지난 늦가을에 보리 파종을 하려는데 보리씨가 없었다. 살림 날 때 보리를 준 것은 식량으로 먹어버려 벌써 없어진 지 오래다. 할 수 없이 처외할머니께 가서 사정을 하였다. 그랬더니 당신이 가지신 보리는 씨로는 적합지 못한 불량종이지만, 이거라도 가져가라 하면서 꾸어주었다. 파종한 보리가 익어서 초여름에 수확했다. 그러나 종자가 나빠서 여섯 섬 밖에 소출이 나지 않았다. 좋은 종자에 비해 석 섬 정도 소출이 줄어든 것이다.

아무튼 이 보리 수확을 하니 그래도 하늘이 트이는 기분이었고 굶어죽지 않을 자신이 생겼다. 감격적이었다. 필설로 그 기분을 옮긴다는 건 불가능하다. 죽음과 굶주림의 파도에서 헤엄쳐 나온 사람은 어렴풋이 느낀다. 왜냐하면 자기가 당한 고초를 되새겨 가슴앓이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남의 병이나 곤경에 처하게 되면 내가 아팠던 것과 비교하여 그 아프고 어려운 정도를 내마음으로 느낀다. 그래서 될 수 있는 한 약자나 병자에게 잘난 체 하거나 있는 체 하고 싶지 않고 마음으로라도 동정을 보낸다. 그래서 공공의 일에서 봉사적 마음으로 일을 하고 그 후 제주시의회 의장으로 있을 때 받은 일비 여비 잡비를 모두 어려운 사람에게 환원한 것도 나의 쓰라린 이 시절의 체험에서 얻어진 것이다.

아내가 마주 앉아 “이젠 굶어죽는 건 면하게 되었소. 곡식이 그득히 쌓여 있으니 배불리 먹으시오”라고 권했다. 아내가 나를 보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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