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6 18:02 (금)
[연륙교](13) 고사리 장마
[연륙교](13) 고사리 장마
  • 왕준자
  • news@newslinejeju.com
  • 승인 2024.03.26 10:06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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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준자 시인
왕준자 시인
▲ 왕준자 시인 ⓒ뉴스라인제주

속을 알 수 없는 음흉한 날.
한라산 봉우리마저 그들 손아귀에 들어가 버렸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마저 해치는 뿌연 것들이 고요하게 깔리며 모호한 웃음을 짓는다.
길 잃기 십상 일어날 고사리가 자라나올 때 찾아오는 고사리 장마다. 제주의 숲 냄새가 물씬 풍기는 말,
3월말에서 4월초 쯤 땅을 촉촉이 적시는 짧은 장마를 언제부터 누가 이렇게 이름을 지었을까?
정겹고 아름다운 이 말은 제주를 느끼기 충분하였다.

“고사리 한웅쿰이믄 식게 명질 다헌다”
고사리는 산 자의 음식이 아니라 했다.
살림이 어려워 계란 한 알 구하기 어려운 시절에 메밀가루 묽게 개어 고사리 두어 가닥 얹어 부침으로 젯상에 올렸다 한다.
식게 퇴물은 먹을 것 없는 아이들에겐 귀한음식으로 부침 한 장을 여러 조각내 나눠먹던 애틋한 음식이다.
정성을 다해 조상님께 올린 제주사람들의 마음이다.
한철에 아홉 번 열 번 악착같이 싹이 올라오는 고사리처럼 자손이 끊기지 않게 해 달라던 제주사람들의 소원이란다.

제주에 온지 두 번째 되던 해,
방치된 밭 둔덕에 고사리 끊으러 따라갔다.
제주사람 눈에만 익은 고사리가 내게 쉽게 곁을 줄 리 없겠지만,
거친 덤불을 헤치고 울퉁불퉁 둔덕을 따라가다 보면 제주의 숨결과 검은 피부를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꼿꼿하게 서서 이파리 끝을 동글게 말고 있는 고사리를 보았다.
너는 누구냐,
어찌 이리 예쁜가,
솜털 보들 한 아기 손으로 독을 쥐고 있다가 비비 비틀어 말라진 뒤 물에 뱉어 놓아야 그 직성이 풀리는 것이냐.
고사리 하나씩 끊을 때마다 몸을 굽혀 절하는 몸짓은 잘생긴 한라의 신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숙이는 것이라 하는데,
무심하게 부는 바람 한 줄에도,
들에 자라는 푸성귀 한 가닥에도, 어느 것 하나에도 의미를 두는 속 깊은 섬인 것을,

백이와 숙제가 주나라 땅에 자라난 곡식을 거부하여 수양산에 칩거하여 고사리를 캐 먹었다는 일이,
생고사리에 독이 있으므로 생명을 부지 할 수 없었거나,
은둔하러 들어간 수양산조차 주나라 땅임을 깨달아 고사리조차 입에 대지 않아 굶어 죽었거나,
서사가 분분하다만, 그들 형제의 충심은 의심치 말았으면 한다.
수양산을 바라보며 단종의 복위를 꿈꾸던 성삼문의 시조를 한 수 읊어본다.

수양산 바라보며 이제를 한 하노라
주려 죽을진대 채미(採薇)도 하난 것가
비록애 푸새엣 거신들 긔 뉘 따헤 낫다니

비가 온다.
고사리 장마다.
이 비 그치면 쑤욱 올라오는 고사리 끊으러 제주사람들은 산으로 들로 꽃처럼 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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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비 2024-03-27 23:38:44
몇 년 전, 화창한 봄!
꿈에 부풀어 한달 살이를 왔더니
때맞춰 고사리 장마 ㅠㅠ
나가면 비오고,들어오면 해뜨고...
'모호한 웃음을 짓던' 그때 그 날씨가
작가님 글 속에 있네요~

추억에 젖어,잘 읽었 습니다~^^*

길동이 2024-03-26 17:58:40
중산간 도로마다 드문드문 차들이 세워져 있는 걸 보니 요즘 고사리 꺾으러 다니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네요~제사상에 고사리를 꼭 올리는
이유는 00이 드시면 힘이 없어
해코지를 못한다네요~
제사 음식에 마늘 고추 양파 같은 양기 오르는 재료를 안 쓰는
이유도 짐작이 가죠~^^

새 빛 2024-03-26 15:07:13
몇일 째 부슬부슬 고사리 장마가 내렸어요
어김없이 이맘때면 내리는 비 ,
둔덕으로 고사리 꺽으러 가던 여인들이 붙인 이름일까요?
작가님도 제주의 여인이 다 되셨네요.
고사리 꺽어 식게에 올리신다는~~~
성삼문의 시조 한 수 잘 감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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