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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상금의 시방목지](98) 포도밭에서
[문상금의 시방목지](98) 포도밭에서
  • 문상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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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4.02.26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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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밭에서
 

문상금
 

오래 묵은 포도나무를 본 적이 있다 흡사 십자가처럼 바짝 메마르고 비틀어진 채로 툭 던져지듯이 숨죽여 있었다 번쩍 푸른 줄기가 솟고 잎들이 무성해지고 그 줄기들은 서로를 기대고 타고 오르듯이 기어올랐다 꼬물꼬물 포도알들이 송이를 틀었다

한순간 나도 평화스런 밭에 한 그루의 포도나무가 되어 살고 싶었다 낮게 엎드려서 숨은 듯 숨지 않은 듯 입 속에 남은 단 한 마디 포도 씨를 물고 살고 싶었다

한순간 술틀에 던져진 몸과 꿈은 으깨어지고 붉게 숙성되어 가면서 시큼한 냄새가 되어 또 하나의 풍문이 되어 이 입 저 입으로 세상을 떠돌았다

아, 저 아득한 포도밭의 평화여 어쩌면 이 세상은 원치 않아도 온몸을 내던져 문드러져 진하고 붉은 혹은 투명한 포도주 한 병 빚는 일인지도 모른다

-제8시집 「하논」에 수록
 

문상금 시인
▲ 문상금 시인 ⓒ뉴스라인제주

한라산 중턱의 벌거벗은 나목처럼 바짝 메마르고 비틀어진 채로 툭 던져져 미동도 하지 않았던 ‘포도나무’라는 옛 기억도 희미했던 가지에 문득 밤새 ‘돈오’라도 했던 것일까, 연분홍 싹이 움텄다. 아, 생명의 시발점인 색은 붉거나 연분홍이다. 며칠 후에는 연분홍이었던 그 첫 잎은 푸른 잎이 되어 손바닥만큼 펼쳐졌고 연일 줄기를 뻗어나가는 것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기대며 푸른 잎 사이로 꼬물꼬물 포도알들이 송이를 틀었다. 아직 딸들이 어렸을 때 “우리는 포도송이야, 흩어지지 않는 포도송이야”라는 말을 종종 하곤 하였다.

아마도 가나안 공소에서 유아 세례를 받고 성장하며 학창시절 각인되었던 성서 속의 식물인 포도나무에 대한 기억 때문일 것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학교를 오가며 또래들과 노래를 부르곤 하였다.

그럴 때 붉은 황무지에 우뚝 솟아 강인한 줄기를 뻗어가는 한 그루의 포도나무가 되고 싶었다. 황무지를 기어가듯 낮게 엎드려서 은둔자처럼 숨어 살고 싶었다. 여기서 ‘우뚝 솟아’와 ‘낮게 엎드려서’는 서로 대비되면서도 연결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땡볕을 맞으며 포도 열매는 갈수록 새콤달콤한 향기를 내뿜었으며 탱글탱글 반짝였다.

무르익은 포도열매는 한순간 술틀에 던져져 으깨어지고 뚝뚝 핏물 번지고 숙성되어가면서 그 시큼한 냄새는 이 풍진 세상을 떠돌았다. 그토록 원하였던 마무리였을까, 아니 애초에 시작과 끝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온몸을 내던져 으깨어 문드러지는 일은 인생의 노년을 닮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강가의 조약돌을 닮았다. 구르고 굴러 매끈하고 반들반들한 그 돌들은 노년의 지혜와 넉넉한 포용력을 닮았다. 으깨어 문드러지는 것과 매끈하게 연마된다는 것은 얼마나 지독한 시련과 인고의 상징일까.

가끔 선물로 와인을 받을 때가 있다. 그 숱한 과정을 거쳐 내 손에 들린 포도주 한 병, 붉은 진한 맛의 투명한 정갈한 맛의 그것들은 온몸을 내던져 재탄생되어 내게로 왔음을. 우연히 포도나무와 조우할 때마다 늘 발을 멈추고 한참을 바라다보곤 한다. [글 문상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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