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6 18:02 (금)
[제주4.3] 김달삼의 해주인민대표자대회 연설문 내용
[제주4.3] 김달삼의 해주인민대표자대회 연설문 내용
  • 뉴스라인제주
  • news@newslinejeju.com
  • 승인 2023.11.01 11:3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주인민해방군 총사령관 김달삼 등 6명, 해주 인민대표자대회 참가
“박헌영 선생의 하신 선거에 대한 보고를 듣고 감격”...“어떻게 싸웠는가 보고”
제주4.3 평화공원 위령탑 원경
▲ 제주4.3 평화공원 위령탑 원경 ⓒ뉴스라인제주

제주 4·3사건이 폭동이며 반란임을 증명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문서는 김달삼의 해주 연설문이다. 제주인민해방군 총사령관 김달삼 등 6명은 지하선거 제주투표지 5만2350장을 가지고 해주 인민대표자대회에 참가하여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고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대한민국 건국을 위한 단선은 반대했지만 북조선 단독 창건에는 적극 참여했다.  특히 해주인민대표자대회연설문은, 조선인민공화국의 입장에서는 '인민항쟁'이라고 주장하지만 대한민국의 입장에서는 폭동이며, 반란임을 확실하게 증거하고 있다.[편집자주]

〇 김달삼의 해주인민대표자대회 연설문

一. 서론

1. 남로당 박헌영과의 관계

대표자 여러분!

저는 박헌영 선생의 하신 선거에 대한 보고를 듣고 감격하였으며

특히 제주도 투쟁에 언급하실 때 지금까지 적과 가렬한 피투성이 투쟁을 하든 저로써는 생생한 기억이 머리 위에 떠올르는 것을 금치 못했습니다.

2. 박선생보고지지하며 그동안 어떻게 싸웠는가를 보고한다.

저는 박선생의 보고를 전면적으로 지지함과 동시에 제주도 안에서는 그동안 어떻게 싸웠으며 이번 민주주의인민공화국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투쟁을 어떻게 하였는가 하는 구체적 사실을 잠간 말씀해 드리고저 합니다.

二. 조국의 통일 자유 독립을 위한 인민들의 무장항쟁

제주도에 있어서의 조국의 통일 자유 독립을 위한 인민들의 무장항쟁은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지금은 더욱 치열하게 승리적으로 발전되고 있습니다.

1. 4.3항쟁의 원인

그러면 제주도에 있어서는 전체 인민들이 이렇게 일어나지 않으면 안되었는가 하는 그 구체적 원인부터 저는 잠간 말씀드리랴고 합니다.

1) 미제국주의

(1) 분활식민지 침략정책 감행

미제국주의는 우리 제주도에서도 남조선 다른 지역에서와 똑같이 친일파. 민족반역자. 반동파친미분자 등 매국도배들에 의거하야 가진 란폭한 분활식민지 침략정책을 강행하고 있습니다.

(2) 애국자들 불법으로 체포

민주주의 애국자들과 무고한 일반 인민들은 까닭없이 불법체포. 고문. 투옥 당하였습니다. 일반농민과 어민들은 강제공출과 혹독한 착취에 신음하고 있으며 일반 인민들은 무권리와 가렴주구에 신음하고 있습니다.

(3) 남조선 근로인민 남로당 탄압대상

더욱히 남조선 근로인민의 유일한 전투적 전위대-남조선 로동당을 비롯한 민전산하의 민주주의적 애국단체들은 가장 잔악한 탄압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4) 그래서 반대해야 함

그렇기 때문에 제주도 인민들은 이에 단호히 반대하야 결정적으로 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작년 3․10투쟁에 있어서도 어린 국민학교 아동들로부터 미군정 관리에 이르기까지 제주도 전체인민들이 파업과 맹휴와 대중적 시위로써 미제국주의 식민지화정책에 대하야 단호한 반항을 행하였습니다.

2) 3․10파업투쟁을 계기로 조병옥 친위대들이 인민토벌장

이 3․10파업투쟁을 계기로 하여 반동은 더욱 폭압과 테러를 강화하여 제주도는 조병옥 친위대들의 가장 야수적인 포위 인민토벌장으로 변하였습니다.

3) 4.3무장항쟁까지 인밈들은 박탈당하고 적은 증원 됨

이때부터 금년 4월 3일 즉 인민 무장항쟁이 시작되던 그날까지 제주도에서는 일제의 인민들의 합법성이 모조리 박탈당하고 적(敵)은 경관의 대량증원, 서청테러단의 륙지로부터의 이입, 모든 관청, 학교 직장에 있어서 일체의 요직을 모조리 륙지 서북출신 악질반동으로써 독점하는 등 단말마적 압박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4) 2월 7일 제주도 4만 농민들의 투쟁으로 인민항쟁의 막을 열어 놓음

그러나 인민은 눌리면 눌릴수록 더욱 단결하며 더욱 강한 힘으로써 반항하고야마는 것입니다. 드디어 제주도 인민들은 지난 2월 7일을 기하여 남조선 전지역에 걸쳐서 쏘․미양군의 즉시 동시철퇴, 유엔위원단의 퇴거, 단선반대 등 투쟁에서 제주도 4만 농민들은 시위로써 인민항쟁의 막을 열어 놓았습니다.


5) 폭동을 일으키고도 평화적인 항거 진압은 잔인무도하며 생지옥이 됨

이같은 제주도 인민의 정당하고도 평화적인 항거에 놀래인 미제국주의자 그 주구-반동경찰은 그 탄압정책을 더욱 잔인한 학살정책으로 강화시켰습니다. 남로당을 비롯한 민전 산하의 민주주의적 애국단체에 대한 폭압은 더욱 악날화해졌으며 민주주의 애국자와 일반 인민들에 대한 살인 방화 강도 파괴는 공공연히 자행되었습니다. 놈들의 비인간적 만행과 폭압이 얼마나 잔인 무도하였는가는 다음과 같은 실례들이 충분히 말하여 줍니다.

(1) 김용철의 경우

3월 4일 조천면에 사는 김용철이라는 22세밖에 안된 중학생을 잡어다가 반동살인경찰은 빨갱이라고 서내에서 구타 고문한 후 화침질을 하여 공공연히 학살하고 말었습니다. 그러나 김용철동무는 최후의 순간까지 「박헌영선생 절대 지지」와 「인민공화국 사수」를 웨치면서 그놈들에게 항거하였든 것입니다. 사건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2) 27세 양운하의 경우

연다러 3월 14일 대정면에서 양운하라는 27세 된 농민을 잡어다가 전신의 뼈를 하나 남김없이 산산히 부시어 죽여버렸으며 18일에는 제주읍 도두리에 사는 박모라는 한 농민을 잡어다가 고문하여 빈사지경에 이르게 한 후 죽기 직전에 가족을 불려다가 살아있을 때 석방했다는 증명을 그 가족으로부터 받은 일이 있었는데 결국 그 농민은 그 경찰서 문을 나와 5분 만에 죽어버렸던 것입니다.

(3) 애월면 송원하의 경우

20일에는 애월면에서 송원하라는 지서장놈이 애월리 거주 농촌부인에게 폭행을 한 후 산에 데리고 가서 일본도로 란자하여 24개소의 상처를 입힌 일이 있고, 조천면 선흘리에서는 빨갱이 근거지라는 구실로 가옥 5호에 방화하고 가축 20두 이상을 총살하였으며 심지어는 심림에까지 방화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것은 사실의 특정적인 것을 몇 가지 예를 들어 말한 것에 불과한 것이며 그 당시의 제주도 정세는 「생지옥」이라는 한마디로써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미제국주의의 직접지휘로 이루어진 전대미문의 야만적 테러와 학살 그리고 파괴 약탈 속에서 신음하여 오는 제주도 인민들에게 미국인들과 그 주구들이 조국의 분활을 공고화하고 남조선을 완전히 미국의 식민지로 만들려는 단독선거 실시가 발표되자 인민들의 적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어찌 폭발되지 않겠습니다? 이에 조국의 통일과 독립을 위하여 단호히 일어서라고 부르짖으면서 제주도 인민들은 자연발생적으로 총궐기하였습니다. 이것이 제주도 4․3인민항쟁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던 원인이며 이것이 제주도 인민군 즉 「산사람」들이 생기게 된 원인인 것입니다.

三. 4월 3일 무장항쟁

드디어 4월 3일 오전 2시를 기하여 인민군 즉 「산사람」들은 총궐기했습니다.

1. 지서 20개소를 일제히 습격

이날 인민의 일부이며 반동의 거점인 지서 20개소를 일제히 습격하여 악질경관 10명과 11명의 테러단 서청원 그리고 악질반동 10명이 인민군의 애국정신에 불타는 정의의 총칼 앞에 제거되었으며 그 외 경관 3명, 반동 5명이 부상되었으며 1개지서는 완전히 소각되고 1개 지서는 반정도 소각되고 인민군은 미국 카빙총 기타 다수의 물품을 로획했습니다.

이러하여 그 빛나는 인민항쟁의 막을 연 제주도 무장반격투쟁은 그 후 계속발전 강화되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적에 대하여 결정적인 치명상을 주었으니 이는 다음의 숫자적 종합 성과에 여실히 표현되어 있는 것입니다.

∙전투-지서습격회수 31회, 야외접전회수 15회 이상, 계 45회 이상

∙숙청-경관 100명 이상, 한민, 독촉, 서청, 대청 기타 반동 400명 이상 계 500명 이상

∙부상-경관 30명 이상, 반동 40명 이상, 계 70명 이상

∙지서소각- 5개 반

∙투항-경관 5명, 반동 2,000명 이상

∙포로-30명 이상

∙피검자 탈환-80명 이상

∙전선절단-893개소

∙도로파괴-79개소

∙로획-소총, 탄환, 쌀, 의복, 철갑, 군도, 창 등 다수입니다.

2. 중요한 전투

그러면 다음 중요한 전투 몇 개를 말씀해 드려 인민항쟁의 편모를 소개해 드릴려고 합니다.

1) 4월 15일 애월면 광령부락 뒷산에서

4월 15일 애월면 광령부락 뒷산에서 우리 소수 정예는 적 기동대 35명과 1킬로에 걸쳐 약 한시간 동안 산악전이 전개되었는데, 이 싸움에서 적은 3명의 희생을 낸체 사체 1개를 유기하고 도주하여 버렸으며 가장 통쾌한 사실은 먼저 말씀드린 3월 4일 조천지서에서 애국학생 김용철 동무를 고문 치사시킨 서북출신 악질순경 한놈이 이 세놈 가운데 끼여 죽었다는 것입니다. 김동무의 원수는 우리 인민군의 손으로 가펐습니다.

2) 5월 13일 조천면 함덕지서를 습격

5월 13일 조천면 함덕지서를 습격하여 마침내 지서를 지키고 있든 경관 6명을 숙청하고 피검자 30여 명을 탈환함과 동시에 지서를 완전히 소각해 버렸습니다. 이에 기뻐한 인민대중들은 인민의 원수 악질경관의 사체를 끌면서 일대 군중대모를 전개하였습니다.

3) 5월 14일에는 한림면 저지지서

5월 14일에는 한림면 저지지서를 습격하였는데 적 10여 명은 2명의 사체를 유기한 체 도주하여 버렸으며 피검자 30여 명을 탈환한 후 지서를 완전히 소각하고 그 직후 이에 호응하는 부락민과 합류하여 굉장한 무장시위를 단행했습니다.

4) 지난 5월 7일 애월면 장전과 산 사이 송림에서 소위

여기서 하나 특기할 것은 지난 5월 7일 애월면 장전과 수산 사이 송림에서 소위 “토벌대”란 이름으로 특파되어온 조병옥의 친위대이며 경찰전문학교 학생 100명 중 60명이 첫 행동을 개시한 것을 탐지한 우리 소수정예는 이를 포착하여 이와 다섯시간 이상 가렬한 전투 끝에 적은 대장이하 22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고 도주하여 버렸습니다. 그 후 그들은 「도저히 전투를 못하겠으니 서울로 돌려보내 달라」고 3일간 맹휴 끝에 나머지 38명만 공포에 떨면서 제주도를 떠난 사실이 있습니다.

5) 5월 20일에 국방경비대 제9연대 대원 43명이 반기를 들고 연대 탈출

5월 20일에 국방경비대 제9연대 대원 43명이 반기를 들고 연대를 탈출하여 대정지서를 습격하여 반항하는 악질경관 6명을 숙청하고 지서를 소각한 후 산으로 올라가 인민군과 합류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6) 5월 24일 안덕지서 급습

5월 24일엔 안덕지서를 급습하여 경관 25명과 접전 끝에 그들에게 사망자만 6명을 내게 하는 타격을 주었습니다.

7) 5월 26일 대정면 신평리 가두에서

5월 26일에는 대정면 신평리 가두에서 적 기동대 60명이 추럭 3대에 타고가는 것을 소수부대로써 우리는 포위 습격한 결과 적은 희생자 14명의 시체와 모자 탄환 등 다수를 유기한 채 도주하여 버린 일도 있었습니다.

3. 전위부대들의 자기 희생적 투쟁의 몇 가지

그러면 이러한 치열한 인민항쟁 속에서 전위부대들의 자기 희생적 투쟁의 몇 가지를 말씀드려 그 편모를 소개해 드릴려고 합니다.

1) 4월 3일 투쟁에 있어 한림면 여관에

4월 3일 투쟁에 있어 한림면 여관에 서청 테러단원 7명이 숙박하고 있는 것을 한 청년이 단신 군도(軍刀) 하나를 가지고 맹습하여 15분 이내에 전원을 숙청한 다음 유유히 도라온 일이 있습니다.

2) 4월 14일 제주읍 화북리에서는

4월 14일 제주읍 화북리에서는 우리 동무 6명이 경관 대청 합해서 25명에게 포위당하여 전멸의 위기에 빠졌을 때 한 청년은 가졌든 권총 하나로써 이와 항전하여 적을 격퇴한 후 전원 무사히 탈출하여 나온 사건도 있습니다.

3) 4월 18일 애월면 애월리

4월 18일 애월면 애월리에서 청년 2명이 권총 하나를 갖이고 가로에서 달려드는 경관 4명과 대전하여 그 중 2명을 숙청한 후 무사히 돌아온 일도 있습니다.

4) 5월 10일 투표소애 수류탄 2발

5월 10일에는 단신으로 삼엄한 경계망을 돌파하여 투표장소인 제주읍 사무소에 수류탄 2발을 던지어 결국 그 투표장소로 하여금 일대 혼란을 일으켜 투표를 불가능하게 한 후 무사히 탈출하여 돌아온 청년도 있습니다.

5) 죽으면서도 인민공화국 만세

그러나 이러한 치열한 투쟁 속에서 물론 우리도 극히 소수이기는 하나 귀중한 희생을 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리종유․강대옥․김봉히 등의 동무들이 일선에서 적의 흉탄에 쓰러졌는데 그 동무들이 이 세상을 떠나면서 우리에게 부탁한 말은 무엇이겠습니까? 「뒷일을 부탁한다. 동무들을 믿고 나는 안심해서 죽는다. 인민공화국 만세!」 모다가 이렇게 해서 죽었습니다. 그 얼마나 비장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6)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아니함

이와 같이 우리들은 동지들의 시체를 넘으면서도 죽엄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조국통일 독립과 민족해방을 위하여 싸워왔으며 또 싸우고 있습니다. 그리하야 우리들은 항상 그 수에 있어서도 압도적 다수일 뿐만 아니라 그 장비에 있어서도 머리에서 발끝가지 미국의 최신식 정예무기로써 무장한 저 반동살인대와 항전하야 언제든지 그들에게 결정적 타격을 주어 패주케 하였습니다.

4. 산사람들을 호응 지지하는 인민들의 자위투쟁

산사람들을 호응 지지하는 인민들의 자위투쟁도 실로 굉장한 것입니다. 그 중 몇 가지 말씀드리면

1) 70세 넘은 노인이 아들의 원수를 갚기 위해 며느리와 함께 싸움

자기 아들을 반동경관에게 잃은 70세 넘은 노인은 자기 자식의 원수를 갑는다고 자기 메누리와 같이 인민군의 행군에 종군하여 일선에서 싸운 일도 있습니다.

2) 소년 소녀들의 도움

소년 소녀들은 담배를 말아서 인민군에 보급하며 또 수기 신호를 해서 적의 부락침입을 미연에 발견 방지하며 또 전투가 끝난 뒤에 곳 달려가서 적의 유기품을 주어서 그를 산에 보내는 등 또 위문문을 써서 산으로 보내여 인민군의 사기를 일층 더 앙양시키는 등 그야말로 눈부신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3) 부인들의 도움

부인들은 자진하여 혹은 산에 가서 인민군의 밥을 지어주며 옷을 지여주며 빨래를 해주는 등 부락에 있으면서 쌀 부식물 신발 등을 산으로 보내여 주며 특히 녀맹에서 산으로 보내는 위문문과 위문품은 산사람들의 유일의 오락으로 되었습니다.

4) 청년들의 도움

청년들은 모두가 자위대로써 부락의 자위에 당했는데 4월 16일부터 18일까지의 3일간 제주읍 이호리에서는 부락민과 적 기동대 25명이 연속적으로 대전하여 공수공권으로 이를 완전히 격퇴시킨 가장 영웅적 부락자위대 활동도 있었든 것입니다.

5) 대중들의 자발적 참여

더욱히 4․3투쟁이 터지자 대중들은 누구의 지도도 없이 자기들의 창발력을 발휘하여 전도적 일대 시위를 단행하였으며 자기들의 원수인 반동분자들의 가옥을 군중적으로 습격했습니다.

이상과 같이 전 제주도 인민들의 적극적지지 참가로써 전개된 제주도 투쟁은 드디어 5월 10일 남조선 단독선거를 완전히 실패케 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북제주에서는 소위 선거가 완전히 실시되지 못하고 남제주에서도 유권자의 불과 몇 퍼센트만이 강제로 참가하고 절대다수가 보이코드를 행하였든 것입니다.

四. 남북 통일 선거로 통일적 중앙정부를 수립활동

제2차 남북제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의에서 결정한 남북 통일 선거로서 통일적 립법기관을 창설하고 통일적 중앙정부를 수립하자는 활동이 전개되자 전도 주민들의 지지가 거대하게 폭발된 것이 가장 필연적인 것은 누구에게나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단선을 반대하는 투쟁에서 빛나는 성과를 거둔 제주도 인민들은 이번 최고인민회의 선거지지 투쟁에도 가장 빛나는 성과를 거두는 것은 조금도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륙지에서는 통일선거 실시가 7월 15일부터 실시 되었지만은 제주도에서는 이 지시가 7월 20일이 지내어 도착되었습니다.

그러나 통일선거는 7월 말까지 벌써 유권자의 80퍼센트에 가까웠을 것을 저는 여러분에 보고할 수 있을 것을 확신합니다.

五. 결론

1. 제주도 전체인민들은 용감하게 투쟁하고 있다.

대표자 여러분!

이와 같이 우리 제주도 전체인민들은 용감하게 투쟁하고 있습니다.

우리 제주도 인민들은 미제국주의와 미군 직접 지휘하에 있는 압도적 다수의 반동경찰 살인테러단 국방경비대의 필사적 공격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결정적으로 분쇄하면서 더욱 승리적으로 투쟁을 발전 강화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우리들로 하여금 이러한 승리를 갖어오게 한 것이겠습니까?

1) 30만 제주도 전체인민들이 불타는 조국애로

그것은 첫째로는 이미 위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30만 제주도 전체인민들이 불타는 조국애로써 강철같이 단결하여 미제국주의와 그 주구 매국노 리승만 김성수 리범석 도배들의 남조선 분활식민지 침략정책을 단호히 반대하고 조국의 통일과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죽엄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히 싸우고 있는 까닭입니다. 특히 인민군 즉 산사람들이 일반인민대중의 적극적 지지에 의하야 고무되고 격려되고 있는 까닭입니다. 만약 부모 형제들이 적의 포위를 뚫고 정보 식량 등을 적극적으로 공급치 아니하였다면, 만약 적수공권으로 무장한 반동경찰을 격퇴하는 인민들의 자위적 원조가 없었다면 산사람들의 투쟁이 오늘 같이 발전치 못하였을 것입니다. 인민과의 연계! 인민의 지지! 이것이야말로 우리들의 승리에 가장 중요한 요인입니다.

2) 전체 조선인민들 특히 남조선 전체인민들의 투쟁이 성과를 얻게 한 기본원인

둘째로 이번 제주도 무장구국항쟁은 고립된 투쟁이 아니라 전체 조선인민들 특히 남조선 전체인민들의 위대한 구국투쟁의 일환인 까닭입니다. 남조선 인민들의 광범한 전국적 투쟁을 전개하고 있는 환경은 적으로 하여금 우리 제주도 무장투쟁을 적극적으로 공격할 수 없게 하는 것임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전체 조선인민들의 노도같은 투쟁-이것이 우리에게 빛나는 성과를 얻게 한 기본원인의 하나입니다.

3) 조국의 완전통일 민주독립을 쟁취할 때까지 싸울 것을 굳게 맹세

이번 제주도 인민들의 거대한 구국투쟁에서 우리들의 조국의 통일과 독립을 위하여 싸우는 위대한 인민의 단결된 힘 앞에는 미제죽주의와 그 주구 매국도배들이 아모리 필사적으로 발악하드라도 그들의 분활식민지화의 흉모는 반드시 실패할 것이면 인민들은 반드시 최후의 승리를 얻고야 말 것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주도 전체 인민들은 승리에의 희망과 확신을 굳게 하여 더욱 용감히 더욱 줄기차게 죽엄과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최후의 승리가 올때까지 조국이 완전통일 민주독립을 쟁취할 때까지 싸울 것을 굳게 맹세하고 있습니다.

2. 남조선 인민의 절대다수의 투표로 선거되어 통일입법기관, 중앙정부 수립

대표자 여러분!

이제 우리는 남조선 인민의 절대다수의 투표로서 선거되여 통일입법기관을 선거하고 우리의 손으로 통일 중앙정부를 수립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과연 위대한 승리입니다. 제주도 인민들이 전 남조선 형제들과 함께 흘린 피는 이제 헛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적선(敵線)에 쓰러진 우리의 동지들의 유지는 그 성공의 앞길이 광범하게 열리었습니다.

인민의 원수 매국노 리승만 김성수 리범석 도배들이 인민의 재판에서 엄중한 판결을 받을 날이 가까워 왔습니다.

여려분!

조선 최고인민회의 남조선 대의원 선거를 성공적으로 완수합시다.

조선 최고인민회의와 통일중앙정부의 깃발 밑으로 북조선 형제들과 공고한 단결로서 통일과 독립을 위하야 끝까지 매진합시다.

우리 조국의 통일과 독립국가 건설의 물질적 토대를 이루는 북조선 민주개혁을 남조선에서 하로속히 실시하도록 우리는 용감히 싸웁시다.

1. 민주조선 완전자주독립 만세!

1. 우리 조국의 해방군인 위대한 쏘련군과 그의 천재적 령도자 쓰딸린 대원수 만세!

◇ 김달삼(金達三) 약력

- 본명은 이승진으로 가명은 김달삼과 이상길을 썼다. -김달삼은 장인 강문석이 사용하던 가명으로 장인에게 물려 받음. - 1924년 남제주군 대정읍 영락리 978번지에서 출생 - 유년기에 부모를 따라 대구에 가서 심상소학교 졸업. - 중학교에 입학했다가 도일하여 일본 성봉중학교 졸업. - 토오쿄 중앙대학 전문부 1년 수료. - 해방되던 해 박헌영과 같이 활동한 강문석의 딸 강영애와 결혼. -1946년 조선공산당 경북도당 대구시당 서부지역 당세포 조직책으로 10․1 대구폭동을 주도.- 제주로 귀향 후 이운방 씨 소개로 대정초급중학교 촉탁교사 재직. - 남로당 대정면 당 조직부장, 제주4․3당시 제주도당책 및 군사부 총책으로 4․3폭동을 주도. -1948년 8월 21일 황해도 해주에서 열린 북한 최고인민대표자대회에 안세훈 등과 같이 참석. - 해주대회에서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국회의원)에 선출되었고 국기훈장2급을 받음. -동년 9월 김일성 등 49인으로 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위원회 헌법위원으로 선출. - 부인은 일본을 거쳐 월북하였고, 그 후 부모와 형도 월북. - 1949년 8월 강동정치학원을 나와 남파되어 인민유격대(766부대) 제3병단 태백산지구사령관으로 빨치산 활동. - 1950년 3월 21일 강원도 정선군 반론산 부근을 거쳐 월북하다 국방군 336부대와 20시간의 교전 끝에 사살. - 묘소는 평양 인근의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가묘로 조성.   

◇자료제공=류승남(한정연 대표, 나정연복음신문발행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신대로5길 16, 수연빌딩 103호(지층)
  • 대표전화 : 064-745-5670
  • 팩스 : 064-748-5670
  • 긴급 : 010-3698-0889
  • 청소년보호책임자 : 서보기
  • 사업자등록번호 : 616-28-27429
  • 등록번호 : 제주 아 01031
  • 등록일 : 2011-09-16
  • 창간일 : 2011-09-22
  • 법인명 : 뉴스라인제주
  • 제호 : 뉴스라인제주
  • 발행인 : 양대영
  • 편집인 : 양대영
  • 뉴스라인제주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뉴스라인제주. All rights reserved. mail to news@newslinejeju.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