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6 18:02 (금)
[문상금의 시방목지](93)국수나 먹자
[문상금의 시방목지](93)국수나 먹자
  • 문상금
  • news@newslinejeju.com
  • 승인 2023.06.19 11: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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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만 먹었던 적이 있다, 종종, 한 솥 끓여서 훌훌 먹곤 하였다’
 

국수나 먹자
 

문상금
 

밤거리에서
우연히 만나거들랑
국수나 먹자

허름한 불빛 어두운 국수집에서
뜨거운 국물 후후 들이키며
국수나 먹자

고춧가루와 파의 매운맛에
눈물 콧물이 나거들랑

너도 참 외로웠구나
실은 나도 오늘 무척 외로웠단다

말없이 웃어주며
국수나 먹자

이 세상은 잔잔한 것 같아도
세찬 파도들이 몰려와
느닷없이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고
또 흔들릴 때도 있어

간혹 밤거리를 배회하다
우연히 만나거들랑

참 장하구나
어깨 두들겨주며

따뜻하고 진한 국물에
불 같은 마음 전하고

탱탱하고 쫄깃한 면발에
돌 같은 단단한 마음 전하며

국수나 먹자
국수나 먹자
 

-제6시집 「루즈 바르기」에 수록
 

문상금 시인
▲ 문상금 시인 ⓒ뉴스라인제주

가끔 그럴 때가 있었다, 밥이 잘 안 먹히는 시간들이 다가오면 늘 국수를 끓이곤 하였다, 한 솥 끓여 멸치 육수에 훌훌 먹노라면 김 솟는 뿌연 풍경 너머 뻘뻘 전신으로 땀이 흘러내렸고 무언지 모를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어 흘러내렸고 어느 순간 시원해지는 느낌이 들곤 하였다.

여기서 눈물 콧물 범벅이라는 것은 고춧가루와 파의 매운 맛 때문은 결코 아니다, 살아가면서 외로움이라든지 억울함이라든지 이해보다는 오해 같은 것들이 늘 생겨나는 이 풍진 세상에서 그런 상처 부스러기 감정 부스러기들이 치솟다가 갈아 앉았다가 눈물로 콧물로 하소연 같이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그러노라면 흔들거리고 방황하던 마음은 차츰 평화롭게 정화되는 것이었다.

일이 끝나고 또 일이 끝나도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밤거리를 자주 나서곤 하였다. 가로등 불빛 따라 길에서 길 끝으로 나란히 걸어가다 보면 골목 국수집이나 술집들이 가장 불빛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한 마리의 반딧불이가 되어 그 환한 불빛 앞을 한참 맴돌곤 하였다, 마치 이 지상에서 마지막 빛나는 불빛을 하염없이 바라보듯이.

우연히 지인들을 만날 때가 있었다, 벌겋게 비틀거리는 그와 그녀들, “우리 국수 먹을까?” 약속이나 하듯이 그와 그녀들은 손사래를 쳤다. “이미 충분히 늦었어. 빨리 집에 가야 돼” 다시 비틀비틀 골목으로 혹은 거리로 총총 발걸음을 옮겼다. 그 뒤편으로 새벽이 오기 전 마지막 불빛이 벌겋게 그리고 이미 쉰 술 냄새와 트림 냄새 팍팍 풍기며 달라붙어 있었다.

“참 장하구나, 참 외로웠구나” 어깨 두들겨 줄 이 하나도 없는 밤거리에서 홀로 오래도록, 천천히, 국수를 먹었다. 고춧가루를 두 숟가락 넣고 파도 추가로 더 넣고 갓 삶은 쫄깃한 면발에 따뜻하고 진한 국물까지 훌훌 다 털어먹어도 눈물은커녕 콧물도 잘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가끔은 잠이 오지 않을 때 시가 써지지 않을 때 밤거리를 종종 나서곤 하였다. 다시 오래도록 환한 불빛 앞을 맴돌다 어느 허름한 국숫집으로 들어가 국수를 먹곤 하였다. 마치 전쟁터로 떠나는 장수의 전야처럼 비장한 각오를 다지며 그렇게 밤거리를 배회하다 결국 집으로 귀가하는 것이었다.

시끌벅적 먹어도 맛있는 국수, 혼자 먹어도 잘 어울리는 국수.

그 흰 버들가지 솜털 같은 면발들을 다 이어 붙여 길이를 잰다면 아마 은하계를 몇 번 왕복하였으리라. 아마도 시인은 참 질기고 오랜 수명을 누릴지도 모르겠다. [글 문상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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