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6 18:02 (금)
[자청비](91) 봉구아빠
[자청비](91) 봉구아빠
  • 이을순
  • news@newslinejeju.com
  • 승인 2023.03.09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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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을순 소설가
이을순 소설가
▲ 이을순 소설가 ⓒ뉴스라인제주

우리집 앞마당 입구 한편에 독채 10평짜리 옵션 원룸이 있다. 그 방에서 아들은 결혼하기 전까지 살았고, 당시 딸은 출산을 위해 그 방에서 몇 달 살다가 떠났다. 사실 그 공간은 내 작업실로 쓰려고 했다. 안집과는 달리 아늑하고 차분한 방의 분위기가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다. 특히 전면 유리창으로 내다보는 앞마당의 풍경이 그야말로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벚꽃, 목련, 동백, 등나무 등 많은 꽃이 피고 지는 것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그래서 그 방에서 글을 쓴다면 글도 술술 풀릴 것만 같았다. 한데 막상 글을 써보려고 하자 기이하게도 영 글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 어떤 영감조차도 떠오르지 않자 나는 어쩔 수 없이 작업실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 뒤 원룸은 한동안 불이 커져 있었고, 남편은 월세라도 받겠다며 세를 놓게 되었다. 그 무렵 지금의 총각이 반려견 ‘봉구’와 함께 들어와 살게 되었다. 그 세월이 벌써 4년째로 접어들고 있다.

처음에는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러자 총각은 봉구가 워낙 착해서 방의 물건에는 흠집 내지 않을 것이라고 하자 남편은 승낙하고 말았다. 우리는 총각이 몇 달만 살다가 이사할 줄 알았다. 6개월 후 딸네 가족이 런던에서 돌아오면 종종 제주에 내려오는 일이 많을 것이며, 그때마다 원룸을 쓰게 될 것이라는 말을 미리 귀띔해두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총각은 우리 원룸에서 살기 시작했다. 하지만 해가 바뀌고 또 바뀌어도 좀처럼 방을 비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바람에 런던에서 돌아와 서울에 사는 딸네 가족은 제주에 내려올 때마다 비좁은 안집에서 우리와 함께 지내다가 떠나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럴 때마다 딸은 그 방을 그냥 두지 않고 왜 세를 놓았냐며, 그것도 하필이면 반려견과 함께 사는 총각에게 준 것을 몹시 못마땅해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이미 그 방을 포기했다고, 그 방 곳곳에 개 냄새가 배어 있어 다른 사람이 들어가 살 수도 없을 것이라며 노골적으로 짜증을 냈다.

그것도 그럴 것이 그 방은 오직 봉구를 위한 공간이 되어 버렸다. 총각은 출근하면서 TV와 방안의 불을 켜 놓고 나갔다. 어디 그뿐인가, 한여름에는 종일 에어컨도 켜 놓았다. 그걸 보다 못한 남편이 하루는 총각에게 왜 쓸데없이 전력을 낭비하냐며 따져 묻자, 총각은 자신이 봉구의 아빠라고 대답했다. 아비가 어찌 자식이 더위에 고생하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있겠냐며, 그래서 에어컨을 켜 주고, 또 봉구가 심심할까 봐서 TV도 켜주는 것이라고 그 이유를 밝혔다. 정말이지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총각의 사생활에 끼어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근데 올해 1월부터 전기료 폭탄을 맞고 말았다. 거의 사십만 원이 나오자 깜짝 놀란 남편은 서둘러 총각 방부터 살펴보았다. TV는 물론 방에 불도 밤낮 가리지 않고 켜져 있고 봉구는 벽에 부착된 전기난로 밑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방안은 후끈후끈한 열기로 가득했다. 그날 밤 총각이 퇴근하고 돌아오자 남편은 전기요금 폭탄 맞은 사실을 알려주며 다음 달부터는 원룸에서 사용한 전기료를 따로 낼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하겠다고 통보했다.

우리는 총각을 ‘봉구아빠’라고 부른다. 봉구아빠는 재작년까지만 해도 월세를 밀리지 않았다. 하지만 코로나가 기승부리자 자영업자들이 어려워졌고, 그 여파로 중식당 주방장이던 총각도 일자리를 잃었다. 그 뒤 몇 달간 백수로 지내면서 월세, 가스비가 점차로 밀리게 되었다. 가스회사에서는 아예 그 방 가스 공급을 끊어버렸다. 남편은 차마 총각에게 방을 비워달라는 말을 할 수가 없어서 새로운 직장에 다니게 되면 밀린 월세를 나눠 낼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총각은 남편의 의견에 잘 따라주었지만 밀린 가스비는 내지 않아서 혹한 겨울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추위에 견뎌지지 못해 전기제품을 과다하게 사용한 것이었다.

3월이 되자 앞마당과 뒷마당 나뭇가지에는 작은 꽃망울들이 탐스럽게 방울방울 맺혀 있다. 지금 총각은 봉구와 함께 앞마당에서 공을 갖고 놀고 있고, 펄쩍펄쩍 뛰어다니는 봉구는 여전히 아름다운 품위를 유지하고 있다. 봉구가 총각에겐 멘탈 갑인 것만은 틀림없는 듯싶다. 총각의 형편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봉구를 위해서라면 아낌없이 돈을 쓰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그런 총각을 볼 때마다 여간 마음이 불편해지는 게 아니다. 안쓰럽기도 하고 한심스럽기도 하고 또 스트레스도 받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남편은 봉구네가 떠날 때가 되면 떠날 것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한다. 그래도 원룸에 불이 꺼져 있는 것보다 불이 환하게 켜져 있는 게 훨씬 낫다는 것이다. 앞으로 전기료, 가스비는 계속 오를 터. 정말이지 고물가 시대에 난방비 걱정이 없는 봄날의 햇살이 기다려지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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