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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상금의 시방목지](87)어머니의 젖
[문상금의 시방목지](87)어머니의 젖
  • 문상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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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3.02.06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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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고파서 울어대면 젖이 자동으로 돌면서 흘러내렸다, 그 축축하고 매끄러웠던 어머니의 젖은 생명의 수밀도였다, 그 향기로운 그리움’
 

어머니의 젖
 

문상금
 

고립은 캄캄한 어둠과 같다
아니 흰 어둠과 같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닷새 엿새 이레
바이러스가 내 이마를 눈꺼풀을 짓눌렀다
치켜도 치켜떠도 저절로 내려앉는

잠 속을 떠돌았다
바다를 떠돌았다

큰 물결 작은 물결 사이로
미역처럼 매끈하게 다가오는
아, 수밀도(水蜜桃)

볼록한 배꼽이 잘렸던 그 날처럼
자지러지듯 울음을 쏟아내며 힘껏 젖을 빨았다

고립은 흰 어둠과 같다
아니 캄캄한 어둠과 같다

-제6시집 「루즈 바르기」에 수록
 

문상금 시인
▲ 문상금 시인 ⓒ뉴스라인제주

붉은 장미꽃 눈부신 오월에 가족들이 줄줄이 확진을 받았다. 복병은 늘 순식간에 당하는 것이라지만 나름 특별 조심을 하고 있었는데, 느닷없었다. 딸애들과 자택으로 가서 현관문을 닫았다. 분명 현관문 안과 밖의 세계는 달랐다. 공기도 달랐다. 선명한 금이 그어진 그 공간을 누가 지켜선 것도 아닌데 함부로 넘나들 수가 없었다.

몇 통의 정기적인 문자와 안부전화들을 받으며 철저히 고립의 세계에 머물렀다. 증상은 가벼웠지만 하루 이틀 점차 무기력해져갔다. 따뜻한 이불을 덮었다가 발로 찼다가 하며 하루 종일 잠을 잤다.

숱한 잠 속을 떠돌았다. 바다를 떠돌았다. 젖을 빨고 싶었다. 그 따뜻하고 조금은 느끼한 어머니의 젖을 먹고 싶다고 울부짖었다. 잠결에 받은 전화기에다 젖 이야기를 하였을까.

“마당에 왔다 갑니다” 라는 문자를 받고 내다본 현관문 너머 마당 한구석에 큰 자루들이 서너 개 놓여 있었다. 빵과 컵라면 그리고 흰 쌀밥들과 사과며 오이, 초콜릿 등 마치 작은 마트 하나를 전부 약탈해 온 것처럼 빼곡하게 들어 있었다. 그 중 한 자루에는 온통 크고 작은 흰 우유가 가득 들어 있었다.

빨대를 꽂고 쏟아지는 잠 사이로 우유를 빨았다. 볼록한 배꼽이 잘렸던 그 날처럼 자지러지듯 울음을 쏟아내며 힘껏 젖을 빨았다. 그리고 잠을 잤고 또 빨았고 또 잠을 잤다.

고립은 흰 어둠과 같았다 아니 캄캄한 어둠과 같았다. 그 경계가 분명한 고립의 시간 안에서는 흰 것과 검은 것이 서로 어우러져 얼룩덜룩한 세상으로 떠돌았다.

후유증일까. 한동안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휘청거렸고 식은땀이 났다. 끝내 한여름 폭염에는 앞으로 맥없이 곤두박질쳐 쓰러져서 찢긴 오른쪽 이마에서 피가 줄줄 흐르는 것이었다. 붉은 피는 소름이 돋았다. 또한 살아있음의 재확인이었다. 응급실로 실려 가는 중에도 피는 끊임없이 흘러 내려 머리칼이 흠뻑 젖었다. 유독 지혈이 잘 안 되고 있다는 것을 몇 번의 사고로 알게 되었다. 그래서 사랑니 발치 후에도 비린내 나고 짠맛 나는 붉은 피를 반나절이나 누워서 늘 삼키곤 하였다.

어찌 보면 잠이나 바다는 어머니의 자궁이었고 가장 아늑한 애기 집이었던 것이다. 큰 물결 작은 물결 출렁일 때마다, 눈물 글썽이는 옥양목 앞치마, 흰 어머니의 얼굴을 되살리며 ‘어머니’ ‘어머니의 젖’ 두 편을 썼다.

“이런 세상도 다 있구나!” 할 정도로 너무나 힘들었던 2022년 봄과 여름의 쏟아지는 잠과 혼미와 고립 속에서 발작처럼 시를 썼다. 그리고 가을이 오기 전에 제6시집 「루즈 바르기」를 펴냈다.[글 문상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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