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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청비](79) 엄마표 김밥
[자청비](79) 엄마표 김밥
  • 이을순
  • news@newslinejeju.com
  • 승인 2022.12.15 0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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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을순 소설가
이을순 소설가
▲ 이을순 소설가 ⓒ뉴스라인제주

엄마가 싸준 김밥이 너무 맛있어서 자주 먹고 싶다는 아들 때문에 나는 종종 김밥을 싸게 된다. 김밥은 아들뿐 아니라 가족들이 모두 좋아한다. 그래서 아들네 햄버거 가게에 갈 때도, 아들 내외가 초대하는 성산포에 있는 모구리 캠핑장으로 갈 때도 매번 김밥을 싸게 된다. 물론 김밥을 싸는 일은 좀 귀찮고 피곤하다. 하지만 가족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떠올리면 내 손끝에서 저절로 정성이 가득 묻어나게 된다. 내 육신이 멀쩡할 때 가족들을 위해 특별히 해줄 수 있는 음식이 있다는 게 그나마도 감사한 일이기 때문이다.

지난달에는 딸네 가족이 내려와서 며칠 머물다가 사위가 하루 먼저 서울로 올라갔다. 딸과 손자는 모구리 캠핑 장을 가보기 위해 그다음 날 서울로 떠나기로 되어 있었다. 손자가 제주에 내려오기 전부터 캠핑장을 가겠다고 노래를 불렀고, 아들 내외는 일부러 그 날을 맞춰 모구리 야영장에 캠핑하게 되었다. 한데 캠핑장으로 가기 전날 손자는 내가 만들어준 성게 비빔밥을 먹고는 그만 탈이 나고 말았다. 다른 사람은 멀쩡한데 장이 약한 손자만 탈이 나서 먹은 것을 죄다 토해냈고, 금세 파리한 얼굴로 시름시름 앓았다. 급히 병원에 다녀온 딸은 아들에게 전화로 아이가 아프다는 사실을 말해주며 캠핑장은 다음 기회에 가본다고 전했다. 그 바람에 김밥 쌀 재료를 사다 놓고도 쌀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다음날, 손자는 캠핑장은 언제 가냐며 빨리 가자고 보챘다. 몸도 성치 않은데 장거리 차를 타고 가는 게 아무래도 무리라고 생각한 딸은 다음 기회에 가보자고 아이를 살살 달랬지만, 손자는 막무가내로 자기는 괜찮다며 빨리 가자고 떼를 썼다. 상황이 어쩔 수 없게 되자 딸은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이런 사실을 알렸고, 우리는 손자를 데리고 모구리 야영장으로 향했다. 아쉽게도 김밥을 쌀 여유의 시간이 없어서 그냥 김밥집에서 필요한 양만큼 사서 가게 되었다.

캠핑장에 도착하자 손자는 언제 아팠냐는 듯이 활기차게 돌아다녔다. 겨우 죽만 먹어 기운도 없을 텐데도 어디에서 기운이 솟는지 아주 잘 놀았다. 그러곤 배가 고프다며 죽이 아닌 김밥을 달라고 하자 딸은 은근히 걱정하면서도 김밥 한쪽을 가위로 잘게 잘라 아이에게 먹였다. 손자는 할아버지와 함께 근처 놀이터에서 토끼처럼 깡충깡충 뛰어다니며 놀다가 이윽고 굼부리가 있는 둥글고 넓은 둘레를 빠른 속도로 달려보기도 했다. 또 텐트 안에 모든 것들이 신기한 듯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고 만지면서 여간 즐거워하는 게 아니었다. 곧장 건강이 회복한 손자는 서울로 올라가면서 내년에도 제주에 내려오면 또 캠핑장에 가볼 것이란다.

남편은 텐트 안에서 고기를 구워 먹는 걸 정말 좋아했다. 나는 며느리가 뽑아준 커피를 마시며 힐링하는 걸 즐겼고, 그럴 때면 간혹 옛 추억도 떠올랐다. 당시 아들이 외손자 나이일 때였다. 경기도 수원에 살던 어느 하루, 남편은 가족들을 데리고 덕유산의 북쪽에 흐르는 계곡 무주 구천동에서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 텐트를 쳤다. 밤하늘엔 별들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그런데 한밤중에 갑자기 거친 빗줄기가 퍼부어대기 시작하더니 그 빗물이 점점 불어나 마침내 텐트 안으로 들어오려고 했다. 두 아이는 세상모르게 쿨쿨 자고 있었고, 빗줄기는 좀처럼 그칠 기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남편과 나는 서둘러 텐트를 친 바로 입구 흙을 정신없이 파내기 시작했다. 그 시절엔 휴대전화가 없어서 달리 도움을 청할 곳도 없었다. 고랑을 만들어서 그쪽으로 빗물이 흘러가게 하는 것만이 최선책이었다. 새벽에는 아이들의 고사리손까지 동원되었다. 덕분에 텐트 안으로 빗물이 들어오는 것만은 가까스로 막을 수 있었다. 날이 밝자 빗줄기는 그쳤고, 우리는 비바람에 거의 다 망가진 그 텐트를 미련 없이 버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도 남편은 텐트를 치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동안 몇 개의 텐트를 샀고, 그건 나들이용으로만 사용했다. 물론 남편은 야외에서 텐트를 치고 하룻밤을 보내고 싶다고 했지만, 과거의 기억이 악몽처럼 되살아난 나는 극구 반대했다.

지금 우리 집 창고에는 예전에 남편이 사둔 새 텐트가 그대로 있다. 남편은 아주 좋은 텐트라며 언제 그걸 활짝 펼쳐 볼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런데 아들이 모구리 야영장에 친 텐트를 본 남편은 그 말을 더는 꺼내지 않았다. 그만큼 요즘 캠핑용 텐트가 너무 잘 만들어져 있고, 그에 따른 살림 도구 또한 가히 감탄할 정도라서 마치 움직이는 펜션을 방불케 했다. 그토록 캠핑을 싫어하는 나조차도 이젠 즐거운 마음으로 캠핑장을 찾게 되었다.

지금 나는 남편과 함께 승용차를 타고 모구리 야영장으로 달려가고 있다. 엄마표 김밥을 싸서 말이다. 벌써 12월 중순으로 접어들고 있다. 그곳에서 아들 내외랑 고기도 구워 먹고 김밥도 맛있게 먹으면서 한 해 마무리를 감사한 마음으로 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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