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8 15:41 (일)
[문상금의 시방목지](85)이중섭의 팽나무
[문상금의 시방목지](85)이중섭의 팽나무
  • 문상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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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10.17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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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나무그늘 아래, 앉아있는 청춘들, 팽나무처럼 휘어지고 구부러진 허리를 잠시 펴고, 하하 호호, 백발과 주름살과 웃음소리 사이를 타고 노는 팽나무 잎들, 톡 톡 톡’ ’
 

이중섭의 팽나무
 

문상금
 

수백 년
구부러지고
휘었기에
제주 모진 바람을
견뎠구나

손을 뻗어
팽나무를 쓰다듬으니

줄기 타고 가지 타고
구부러지고 휘어진 기운이
내게로 와

나도 구부러지고
휘어지고

앞으로 수백 년은
잘 견디겠구나
 

-제6시집 「루즈 바르기」에 수록
 

문상금 시인
▲ 문상금 시인 ⓒ뉴스라인제주

이중섭 거주지 남쪽 올렛길 돌담 따라 이삼 분 걷다보면 족히 이삼백년은 더 먹은 팽나무들이 서너 그루 서 있다.

휘어지고 구부러지고 다시 쭉 뻗어가다가 또 휘어지고 구부러지고, 맨 밑동은 텅 비어 동굴처럼 허연 배를 드러내고 있다. 그 누군가도 허전하였을까, 꽃 몇 송이 꽂혀있을 때가 간혹 있다. 다시 그 팽나무 앞을 지나다보면 꽂혀있는 꽃송이 한 쪽에 음료수 한 병도 놓여 있을 때가 있다.

이중섭도 떠나고 그 부인인 이남덕도 떠나고 ‘70년만의 귀향’으로 ‘섶섬이 보이는 풍경’이 내걸린 이중섭 미술관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풍경들은 팽나무와 바다 그리고 그 푸른 바다에 담담히 떠있는 섬 하나, 바로 섶섬이 햇살에 반짝거린다.

팽나무는 축축한 땅과 마른 땅의 경계에서 주로 살며 강과 바다 육지의 경계에서 자주 발견된다고 한다. 평안남도가 고향인 이중섭이 이 곳 서귀포 자구리바다에서 가족들과 게를 잡고 해초를 따며 살았던 일 년여 시절, 짧은 생애 중에 가장 행복했다던 서귀포에서, 그때나 지금이나 팽나무가 무성하다는 것은 아주 깊은 인연이랄 수밖에 없다. 그 육지와 바다, 이중섭과 서귀포, 그 경계에 화가가 있고 시인이 있고 그림이 있고 시와 노래가 있고 또 그리움이 있다.

‘어린 시절 저 나무 타고 안 논 사람 없고, 기쁜 날 저 나무 아래서 잔치 한 번 안 한 사람 없고, 간절할 때 기도 한 번 안 한 사람 없다.’ 이것은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나오는 대사의 일부이다.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소덕동 언덕 위에서 함께 나무를 바라봤을 때 좋았습니다.” 변호사 우영우가 생모를 만나 함께 바라보았던 마을 언덕 높은 곳에 자리를 잡은 커다란 팽나무. 수령은 500살, 높이 17미터, 나무둘레 680센티미터인 나무의 몸통과 무성한 나뭇가지와 짙푸른 잎들을 바라만보아도 오랜 세월 풍상을 견뎌왔을 그 모습은, 그 자체로 한 폭의 수채화요 감동으로 다가와 많은 이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다고 한다.

나도 이중섭 거주지 남쪽으로 씨앗 한 톨이 자리 잡고 뿌리내려 오랜 풍상을 견뎌온 팽나무를 가끔 바라보며 파도같이 몰려오는 감동을 받곤 한다.

어쩌면 숨 쉬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참 대견하고 훌륭한 현실에서, 수백 년을 비록 구부러지고 휘어질지언정 한결 같은 푸른 마음으로 서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최고의 모습이란 생각이 든다.

그런 푸른 훈장을 주렁주렁 매단 팽나무 앞을 지날 때마다, 영광(榮光)이라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우고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깊이 숙여서 예를 갖추곤 한다.

혹 다시 생(生)이 주어진다면, 한 그루의 나무로 태어나고 싶다. 붉은 땅 속 깊이 질긴 뿌리 내리고 무성한 잎과 꽃과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싶다.[글 문상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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