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6 18:02 (금)
[문상금의 시방목지](84) 제주 상사화
[문상금의 시방목지](84) 제주 상사화
  • 문상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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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09.26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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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는 말은 갈수록 희소해질 것이다, 드문드문 쓰이다 흰 파도처럼 소멸해 갈 것이다, 시인도 이렇게 생각하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제주 상사화(相思花)
 

문상금
 

한 번의 치솟음을 위하여
악착같은 발기(勃起)

이 늦사랑을 위하여
꽃대를 올려 보았느냐

나는 일몰 같은
붉은 북을 두드린다,
제주 상사화(相思花) 밭에서

두둥 두둥
둥둥둥

온통 상사화(相思花)다,
상사화(相思花)다
 

-제6시집 「루즈 바르기」에 수록
 

문상금 시인
▲ 문상금 시인 ⓒ뉴스라인제주

낮엔 무덥고 밤엔 조금씩 살갗을 스치는 공기가 시원해지고 있음을 느낀다. 눈을 감는다. 소나무와 동백꽃이 어우러진 숲이 온통 벌겋다.

한 번의 치솟음을 위한 악착같은 발기가 일어나고 있는 제주 상사화 밭에는 이 여름과 가을의 경계를 뚫고, 밤낮으로 벌건 강줄기가 흐른다. 그 강줄기에 반짝반짝 떠오르는 밤하늘의 별들.

‘꽃은 잎을 그리워하다 지고

잎은 꽃을 그리워하다 지는

꽃의 기다림으로 눈은 더 넓게 열리고

잎의 기다림으로 귀는 더 깊게 열리는

붉은 영혼의 빛들이 날아와 춤추는 내 뜰’

첫사랑과 늦사랑을 나란히 세워놓고 본다면 체감의 온도는 다소 차이가 있을지라도 그 사랑의 불씨의 강도는 영락없이 똑같다. 다 졌다고 생각할 때, 비로소 샛별이 솟아오르듯이, 새벽달이 떠오르듯이, 그렇듯 열정을 삭히며 늦사랑도 불잉걸처럼 타오르는 것이다.

대세는 기울었지만 미처 떠나지 못한 늦여름이 채송화, 분꽃, 맨드라미, 난타나의 꽃잎을 더 붉게 만들고 있다.

초가을은 왠지 서럽고 억울하다. 그러나 서서히 가을 풀벌레들이 노래하기 시작하고, 길가 감들은 곱게 익어가고, 푸르렀던 숲의 나뭇잎들은 하나둘 가을의 추억을 기억하며 물들기 시작하였다. 하늘에 떠있는 태양과 별들의 색감을 받아들이며 노랗게 빨갛게 단풍들 준비가 시작되었다.

늦여름아, 이제 붉은 눈물을 흘리지 말라. 기꺼이 비워줌으로써, 새로운 이를 받아들이는 것. 떠나야 할 때는 여지없이 떠날 수 있는 것이, 삶의 질서라는 것을.

여름이 떠나가는 빈 의자에, 이제 가을이 성큼 다가오고 있다. 그 경계의 길목에 제주 상사화 밭에 섰다. 나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오래도록 일몰 같은 붉은 북을 두드렸다. 두둥, 둥둥, 둥둥둥.

쑥, 쑤욱, 발기하는 상사화 꽃대들, 온통 상사화다, 이 빌어먹을, 눈시울 붉은 그대는 상사화로 온다.[글 문상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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