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8 15:41 (일)
[문상금의 시방목지](80) 바람에게
[문상금의 시방목지](80) 바람에게
  • 문상금
  • news@newslinejeju.com
  • 승인 2022.07.16 10: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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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잎에 머무는 바람, 나뭇잎에 머무는 바람, 밤새워 바람은 불고 또 불고'

 

바람에게
 

문상금
 

네가 떠나지 않아도
내가 떠날 수 있다는 걸
이제야 알겠습니다

창밖에
밤새워
바람은 불고
바람은 불고

내 눈물 하나로
이 세상 꽃들이 피고
내 슬픔 하나로
이 세상
새들이 날아갑니다

내 이제야
그대를
기꺼이 보내겠습니다
 

-제2시집 「다들 집으로 간다」에 수록
 

문상금 시인
▲ 문상금 시인 ⓒ뉴스라인제주

바람은 형체가 없다. 형체도 없으면서 어디에나 있다. 저 푸르른 나뭇잎을 흔들고 꽃잎을 흔들고 풀들을 긴 머리카락처럼 흔들며 ‘나 여기 있노라, 여름날, 건재 하노라’ 부지런히 손 흔든다.

때로 성난 큰 물결 되어 한바탕 바다를 뒤집어놓기도 하고 가로등 옆 전봇대의 전선에 붙어 밤새 윙윙 울어대기도 한다. 플라타너스 그 넓은 잎을 온통 갈기갈기 찢어 도로 바닥을 너저분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 찢기고 찢긴 잎들을 밟아보면 그래도 마지막 물기가 남아 푸르게 배어나오곤 한다.

바람은 형체도 없이, 어디에나 있다. 내 얼굴을 만지고 내 꽁지머리를 흔들고 내 눈물을 날리고 내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창 밖에 바람은 불고, 또 바람은 불고 ...

바람이 날려 보내준 내 눈물 한 방울이 톡 떨어져 이 세상 꽃들은 쉴 새 없이 피어나고, 이 세상 새들은 쉴 새 없이 날아다닌다.

참 오래 걸렸다, 이제야 그대를 기꺼이 보낼 수 있는 날, 참으로 오래 걸렸다.

“섭섭하게,
그러나
아조 섭섭치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來生)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미당 서정주 시인은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라는 명시를 남겼다. 가곡으로 작곡된 노래를 들으며, “아주 영 이별은 말고/어디 내생(來生)에서라도/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라는 대목에서는 문득 눈물이 흐른다.

만나는 사람과는 반드시 이별하는 것이 회자정리(會者定離)의 이치요, 헤어지면 또 만나는 것이 거자필반(去者必返)의 법칙이랄 수 있다.

한여름 날, 연꽃을 보러 가고 싶다. 지글지글 끓어오르는 진흙탕 물속에서 마음 깊은 곳으로 향기 뿜어 올리는 연꽃들의 고고한 자태를 엿보러 가고 싶다.

연꽃 같은 연잎 같은 은은한 마음을 갖고 싶다.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 어디 있으랴. 상처 입지 않는 마음이 어디 있으랴.

눈 감으면 내 마음의 밭에 숱하게 피고 지는 연꽃들.

연꽃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오래, 머물다 와야겠다. [글 문상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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