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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신의 벌랑포구](53) 의자
[김항신의 벌랑포구](53) 의자
  • 김항신
  • news@newslinejeju.com
  • 승인 2022.03.28 12: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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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
 

이정록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의자》문학과지성 2006
 

이정록 시인
▲ 이정록 시인 ⓒ뉴스라인제주

< 이정록 시인>

1964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으며
1989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시 <농부일기>,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혈거시대(穴居時代)> 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2001년 제20회<김수영문학상>, 2002년 제13회 <김달진문학상>, 2013년 제8회 <윤동주문학대상>, 2017년 제5회 <박재삼문학상>, 2021년 제28회 <한성기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화in) 만해문예학교장이다.

<저서>

《벌레의집은아늑하다》(문학동네,1994) 《풋사과의 주름살》(문학과지성사,1996) 《버드나무 껍질에 세들고 싶다》(문학과지성사,1999) 《제비꽃 여인숙》(민음사, 2001) 《의자》(문학과지성사, 2006) 《정말》(창비,2010) 《가슴이 시리다》(지식을만드는지식,2012) 《시인의서랍》(한겨레출판, 2020 개정판) 《어머니학교》(열림원, 2012) 《아버지학교》(열림원, 2013) 《저 많이 컸죠》(창비, 2013) 《미술왕》(한겨레아이들,2014) 《똥방패》(창비, 2015) 《대단한단추들》(한겨레아이들, 2015) 《지구의맛》(한겨레아이들, 2016)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목록》(창비,2016) 《까짓것》(창비,2017) 《달팽이학교》(바우솔,2017) 《동심언어사전》(문학동네, 2018) 《시가 안 써지면 나는 시내버스를 탄다》(한겨레출판, 2018) 《황소바람》(바우솔, 2019) 《나무 고아원》(동심, 2019) 《아직 오지 않은 나에게》(사계절,2020) 《아니야!》(문학동네,2021) 《어서오세요만리장성입니다》(킨더랜드, 2021) 《아들과 아버지》(단비어린이, 2021)

김항신 시인
▲ 김항신 시인 ⓒ뉴스라인제주

새내기 창작 활동하던 날 '의자'에 대해서 습작하던 때 의미를 부여하지 못했던 지난날이 생각이 난다.

간간히 서울 나들이하며 서점에 진열된 이정록 시인의 '의자'가 보여도 별 관심이 없던 내가 어느 날부터 '의자'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만한 나이에는 너나없이 겪어야 하는 과정 인양 병원에 가도 일상 어디를 봐도 다 그렇게 의자에 기대어 앉을 대상들이 보일 뿐이다.

오래전에 서점에서 다른 시집들과 함께 구입해서 읽다가 접어두었던 시편들을 이제야 다시 펼쳐 들었다.

이정록 시인의 '의자'가 어떤 의미를 부여했는지 시어 속으로

들어가 보자.

첫 번째 연에서 어머니 '화자'가 아들에게 한 소식 던진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인다고, 꽃도 열매도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라고, 꽃도 열매도 서로 상관물 관계에서 서로 받쳐주며 의지하며 사랑하면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이치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내가 지금 여기에 등장한 어머니처럼 허리가 고장이 생겼다. 이 병원 저의원 동분서주하다가도 걷는 것이 힘에 부칠 때면 모든 게 '의자'로 보이듯 기댈 언덕이 정말로 필요함을 느낀다.

기댈 의자가 얼마나 소중한지 몸소 겪어가는 중이다.

둘째 연에서 어머니는 '화자'인 아들에게 아버지 산소 좀 다녀 오라신다.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라고, 생활 속에서 체감하며 풀어가는 모자의 돈독한 면을 보여주는 따뜻한 시선이 정겹다.

이제 좀 더 따뜻해지면 나도 아버지 산소 한번 찾아가야겠다.

그래도 내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가 아녔던가.

셋째 연에서 어머니는 침 맞고 와서 참외밭에 폭신폭신한 지푸라기도 깔아주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고 하신다. 식구니까 의지할 '의자'가 필요한 것이다.

삼라만상의 모든 만물이 서로 엉키며 의지하며 살아가는 게 우리 정서에 맞는 이치가 아닐까 서로 의자가 되면서...

마지막 연에서 어머니는 '화자'에게 식구들과 싸우지 말고 살라고 하신다.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 아니라고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라고.

이렇게 시인은 소소한 일상에서 느끼고 보이는 것들에 다가가 어머니가 아들에게 말하듯 생활 속에 담담하게 풀어내고 있다.

우리네 인생사 살아가는데 별게 있는가 싶다. 위에서 어머니가 말씀하시는 것처럼

그렇게만 살아갈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지 않을까.

그 날도 침 맞고 와서 별도봉 둘레길 걸어보는데 의자에 몇 번을 앉았는지, 모든 게 '의자'로 보여서 다행이고 고마운 시간이었다.

이렇게 의지하며 받쳐주며 살아가는 게 우리네 인생사 아닐까.

이정록 시인의 시집, 표지에 보면
이런 글귀가 있다.

《의자》는 평화롭고 풍요로운 시집이다. 인간과 자연의 대결이 아닌 조화롭고 동등한 세계를 보여주기 때문에 평화롭고, 유토피아를 그리는 것이 아닌, 자연과 삶에 대한 시인의 따뜻한 사랑의 구체적인 결과이기 때문에 풍요롭다. 놀라워라! 시인의 일상에는 작고 하찮은 사물들이 자연스럽게 삶을 이루고 소중하게 서로를 감싸고 있다. 이렇게~[글 김항신 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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