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극순간의 예술 디카시감상
숙성
익어간다
너도 나도
디오니소스의 그림자가 부활하고
시인들은 철학자가 되는 과정을 깨달았다
-신현준
<신현준 시인>
창원 거주
시사모. 한국디카시인모임 회원
'고도를 기다리며'를 쓴 사무엘 베케트는 삶은 기다림의 연속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순간순간 무엇인가 기다리며 삽니다.
첫눈을 기다리고 꽃이 피기를 기다리고
합격 통지서를 기다리고 택배를 기다리고 군대에 간 아들의 제대를 기다리고 퇴근시간을 기다리고 찻집에 앉아 주문한 차를 기다리지요
오늘 디카시의 주제도 기다림입니다.
시인은 시작노트에서
"속도를 늦추고 와인셀러를 들여다본다
익어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인생도 시도 일정 단계의 숙성과정을 거쳐야
더욱 좋은 맛과 향기로 태어난다는 것을
재삼 느껴본다
가슴속에 한 편의 시를 간직하고
익어가는 우리들의 행복한 순간들이 좋다"
숙성은 식품이 특유의 맛과 향기를 갖게 만드는 기술입니다
오늘 주인공인 와인은 온도, 습도, 진동에도 예민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다려 주어야지요 이 모든 것이 다 갖춰질 때 맛있는 와인이 되겠지요
기다린다는 것은 견디는 것입니다
추위를 견디고 더위를 견디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을 견뎌내고
내가 미운 사람을 견뎌내고 그렇게
내 몫의 짐을 지고 가는 것입니다.
새해가 시작된 지도 닷새가 지났습니다.
올 한 해 어떤 다짐을 하셨는지요
어떤 소망을 품어 보셨는지요
어떤 다짐이던 소망이던 불시에 이루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기다림과 견뎌냄을 지나고 나면 올 연말쯤 새해에 품었던 소망 앞에 서겠지요
원했던 그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더라도
그걸 위해 견뎌낸 시간들이 무엇보다 소중합니다.
그것으로 어쩌면 또 다른 소망 하나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삶은 그렇게 이어지는 거지요
향을 싼 종이에서는 향내가 나고 생선을 싼 종이에서는 비린내가 난다고 했습니다
잘 살아야지요 잘 익어가야지요.
[글 구수영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