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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상금의 시방목지](30)수레바퀴 밑에서
[문상금의 시방목지](30)수레바퀴 밑에서
  • 문상금
  • news@newslinejeju.com
  • 승인 2021.07.26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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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상금 시인

‘수레바퀴의 중심은 태양이다, 하늘에서 회전하는 태양이다, 원주는 현현(顯現) 세계의 한계점을 말한다, 바퀴의 중심은 정지점이며 움직이면서 또한 움직이지 않는 우주의 중심을 말한다, 수레바퀴는 무지막지하다, 수레바퀴 밑은 암흑 같은 어둠이다, 무법지대다, 선명한 눌린 자국이다, 수레바퀴가 지나간 자리는 꽃잎도 풀잎도 지렁이도 짓밟히고 으깨어져 있다, 숨 쉴 수 없을 만큼 묵직한 수레바퀴 밑에서 버둥거리는 너와 나 그리고 우리’
 

수레바퀴 밑에서
 

문 상 금
 

그래도 일말의
위안이 있다는 말은
진흙길에서 불끈 일어나
세상을 향해 걸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
바로 내 자신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철저하게 쓰러진
내가 일어서는 것이다

알을 깨고
세상 속으로

 

-제3시집 「누군가의 따뜻한 손이 있기 때문이다」에 수록

 

문상금 시인
▲ 문상금 시인 ⓒ뉴스라인제주

근처(近處)에 고근산(孤根山)이 있다, 외로이 저 홀로 서 있다, 둥근 무덤 같이 엎드린 것도 같다, 나만의 느낌일까, 그곳을 지날 때면 마치 산 남쪽은 이승, 산 북쪽은 저승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바람 불고 비가 내리거나 운무가 짙게 몰려오곤 한다. 그러다 아차 하는 순간에, 고근산 아래 도로는 짙은 안개의 세상이 되어버렸다.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안개 속을 등(燈)이란 등(燈)은 다 켠 채, 더듬더듬 기어갈 때가 있다.

거울 속으로 들여다보이는 세상은 끝없이 이어진 안개의 터널, 낯선 미궁 속으로 한없이 빠져든다. 서둘러 벗어나려고 할수록 그것은 거대한 블랙홀의 세계로 변해 나를 단숨에 삼켜버리는 것이었다.

그 안개의 세계에 갇힐 때마다 문득 사춘기 때 심취했던, 독일의 시인이며 소설가인,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밑에서’와 '데미안'이 떠오른다. 아주 우연히, 길모퉁이 책방에서 만난 이 책들을 가슴에 품고 온 시내를 발이 부르트도록 헤매고 다니면서 혹은 책가방 깊숙한 곳에 보물처럼 감춰놓곤 하였다.

여리고 섬세했던 시절 그러나 질풍노도의 시기를 공감하며 그 무엇인가에 대한 한없는 동경으로 수백 번 반복해 읽었던 것이다. 스스로 책들의 무덤이라고 부르는 내 책장에 누렇게 관록을 자랑하며 꽂혀있는 ‘수레바퀴 밑에서’와 '데미안'을, 가끔 한 장 한 장 넘겨볼 때가 있다.

‘수레바퀴 밑에서’는 1906년에 발표한 작품으로 헤세의 마울브론 신학교 시절의 체험을 바탕으로 천부적인 소질이 있는 한 소년이 몰이해한 어른들의 세계에서 상처를 입고 고민하는 것을 묘사한 작품이다. 한스의 아버지는 자식의 미래에 희망을 걸었고, 학교 선생님은 한스가 학교의 명성을 올려주기만을 바라며 지나치게 공부만 시킨다. 결국 우수한 성적으로 신학교에 입학하여 장래가 촉망되는 신학생이 되지만 끝내는 신경쇠약에 걸려 고향에 돌아오고 직공이 된다. 직공이 되어서도 동료들 사이에서 소외당하여 상심한 나머지 강에서 투신자살하고 생을 마감하는, 안타까운 소년의 입장에서, 비인간적인 어른들의 세계를 비판하고 있으면서 또한 서정미가 짙은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그 시절이든 이 시절이든, 학생들에게 드리워진 억압의 굴레가 조금만 느슨했더라면, 푸른 꿈을 향해 자유롭게 날 수 있도록 주위 어른들이 도와주었더라면, 크고 작은 수레바퀴 밑에 깔려 제대로 숨도 못 쉬고 절망하다 죽어가는 또 다른 어리고 안타까운 한스들은 사라지지 않을까.

‘데미안’은 1919년에 발표한 작품으로, 나로부터 시작하여 나로 향하는, 한 존재의 치열한 성장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신앙과 지성이 조화된 따뜻한 가정에서 자라난 라틴어 학교의 학생이었던 싱클레어는 불량배 프란츠를 따라 거칠고 어두운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다. 그 때마다 데미안은 싱클레어를 구해내고 그 소년을 자기 발견의 길로 인도한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만나게 되면서 어두운 무의식의 세계에서 의미 있는 자기 내면에의 길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데미안은 카인과 아벨이라는 성경의 구절을 새로이 해석함으로써 싱클레어에게 선과 악을 다르게 생각하게 해주었다. 자신이 속해있는 세계와 금지된 다른 세계, 자신 내부의 선과 악이 대립하며 싱클레어는 구도의 길을 걷게 된다. 그의 구도의 과정은 성숙하지만 절대 진리는 진리탐구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고뇌를 통한 것이란 걸 깨달은 후 데미안을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데미안은 자아 또는 경지에 이른 바로 자기 자신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시와 소설을 쓰면서도, 헤르만 헤세 역시 신학교 기숙사의 속박을 벗어나지 못하고 탈주나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는 시계공장에서 일했으며 서점의 견습생 점원을 거치며 첫 시집 '낭만적인 노래'로 릴케의 인정을 받았고 '수레바퀴 아래서' ‘데미안’ '싯다르타' '유리알 유희' 등의 저서를 남겼다. 세상을 떠날 때까지 헤세는 오로지 자기실현의 길만을 걸었고 수많은 작품을 남기게 된 것이다.

여기서 데미안은 싱클레어이며, 곧 헤르만 헤세 자신을 말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싱클레어는 어렸을 때 잠시 함께 했던 데미안을 찾아 헤맨다. 싱클레어의 눈에 비친 데미안은 자신의 유약함을 태워버릴 정도로 강한 사람이다. 바로 열망하는 동경의 대상이 됨과 동시에 자신이 되고 싶은 모습이다. 자신이 스스로를 초월했을 때의 모습 바로 그것인 것이다. 그것은 또한 내 속에서 꿈틀대며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 무엇인가를 우리는 살아보려고 하는 것이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오십을 넘긴 나이에도 영원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처럼 가끔씩 던져보곤 하는 물음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바로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라 할 수 있겠다. 일찍이 그 어떤 사람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본 적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수레바퀴 밑에서’와 ‘데미안’을 다시 한 번 읽으며 나를 찾아가는 길, 내 속의 또 다른 나를 찾아가는 길을 보았다.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문명이 발달하여도 그 누구도 근본에서 피해갈 수 없는, 한 시절의 아픈 방황과 그 끝을 이 책들은 세밀히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특히 성장기인 청소년들이 애독하는 책 중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솔직히 나는 ‘데미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두 개의 영역’ ‘새는 알에서 빠져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abraxas)다’ 가장 인상 깊었던 문구이며 지금도 종종 큰소리로 읽어보곤 한다.

하늘은 늘 푸르렀고, 그 푸른 하늘 속을 마음껏 날 수 있으리라 부풀었던, 예민했던 십대에 그나마 헤르만 헤세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게 되었고 수없이 반복해 읽으면서 나는 앞으로 펼쳐질 인생살이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소멸을 향해 치달리는 안개처럼 우리 모두는 완벽해지기 위하여 인생을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실수와 허점투성이인 채로, 넘어지기 위하여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록 자갈길에 넘어져 피투성이가 될지라도 다시 일어서기 위하여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너와 나는, 어떤 수레바퀴 밑에서, 버둥거리고 있는가.

제대로 넘어질 준비가 되었는가, 다시 일어설 수 있겠는가.[글 문상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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