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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순진의 시의 정원](53) 여름의 할 일
[양순진의 시의 정원](53) 여름의 할 일
  • 양순진
  • news@newslinejeju.com
  • 승인 2021.06.18 09: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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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인 시인
김경인 시인
▲ 김경인 시인 ⓒ뉴스라인제주

여름의 할 일


김경인


올여름은 내내 꿈꾸는 일
잎 넓은 나무엔 벗어놓은 허물들
매미 하나 매미 둘 매미 셋
남겨진 생각처럼 매달린
가볍고 투명하고 한껏 어두운 것
네가 다 빠져나간 다음에야 비로소 생겨나는 마음과 같은

올여름의 할 일은
모르는 사람의 그늘을 읽는 일
느린 속도로 열리는 울음 한 송이
둥글고 오목한 돌의 표정을 한 천사가
뒹굴다 발에 채고
이제 빛을 거두어
땅 아래로 하나둘 걸어 들어가니
그늘은 돌이 울기 좋은 곳
고통을 축복하기에 좋은 곳

올여름은 분노를 두꺼운 옷처럼 껴입을 것
한 용접공이 일생을 바친 세 개의 불꽃
하나는 지상의 어둠을 모아 가동되는 제철소
담금질한 강철을 탕탕 잇대 만든 길에,
다음은 무거운 장식품의 모자를 쓴 낱말들
무너지려는 몸통을 꼿꼿이 세운 날카로운  온기의 뼈대에,
또 하나는 허공이라는 투명한 벽을 깨며
죽음을 향해 날아오르는 낡은 구두 한 켤레 속에,

그가 준 불꽃을 식은 돌의 심장에 옮겨 지피는
여름, 꿈이 없이는 한 발짝도 나갈 수가 없는
그러니까 올여름은 꿈꾸기 퍽이나 좋은 계절

너무 일찍 날아간 새의
텅 빈 새장을 들여다보듯
우리는 여기에 남아
무릎에 묻은 피를 털며
안녕, 안녕,

은쟁반에 놓인 무심한 버터 한 조각처럼
삶이여, 너는 녹아 부드럽게 사라져라

넓은 이파리들이 환해진 잠귀를 도로 연다

올 여름엔 다시 깨지 않으리

 
-<일부러 틀리게 진심으로>, 문학동네, 2020
 

양순진 시인
▲ 양순진 시인 ⓒ뉴스라인제주

봄에서 여름으로 건너오는 동안 시보다는 꽃과 커피와 고양이와 고령 장애인들과 함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장미와 수국에게 마음 맡기고 있었고 접시꽃과 능소화에게 슬픔을 전수받고 있었다. 고양이와의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고 고령장애인들의 인생을 받아적었다.

여름 날 어느 저녁, '이 여름은 그 무엇을 위해 바쳐야 하나' 자문하며 전농로 벚꽃길을 달리고 있었다. 신호등 앞에 잠시 멈췄는데, 커다란 문장에 눈길이 갔다. 내 자문에 대한 답이 거기 있었다.

  올 여름의 할 일은
  모르는 사람의 그늘을 읽는 일

제주시 전농로 향기로운 벚꽃길 맨 끝길 교보생명 건물 위엔 항상 글판이 걸려 있다. 해마다 바뀌는 명문장, 올해는 김경인의 시 '여름의 할 일'의 2연 첫 2행이 뽑혔다.
광화문 글판은 1991년부터 30년간 희망과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데 올해도 8월 말까지 광화문 교보생명 빌딩과 강남 교보타워 등지에 걸린다고 한다.

  나는 얼른 시의 전문을 찾아냈고 시가 없이는, 꿈이 없이는 한 발짝도 나갈 수가 없는 올 여름을 생각했다.

  올 여름은 내내 꿈꾸는 일
  (그들의 자서전 쓰듯 나의 자서전 쓰며)

  올 여름의 할 일은
  모르는 사람의 그늘을 읽는 일
  (고령 장애인들의 기억과 회상을 받아적는 일)

  그늘은 돌이 울기  좋은 곳
  고통을 축복하기 좋은 곳
  (그늘을 읽는다는 건 그늘을 껴안는 일)

  올여름은
  분노를 두꺼운 옷처럼 껴입을 것
  (코로나로 인한 모든 분노와 절망을 역류시킬 것)

  그러니까 올여름은
  꿈꾸기 퍽이나 좋은 계절
  (올여름은 모르는 사람들과 꿈꾸기 좋은 시간)

남은 여름도 나는 고령장애인들의 그늘을 읽고, 받아적고, 묶을 것이다. 그러나 완전하게 이해하려고 발버둥치진 않을 것이다. 이 세상엔 그 무엇으로도 치유할 수 없는 상처가 있고 그늘이 있고 숙명이 있다.
시나 노래로, 그림과 영화로 아무리 사라진 기억 되살리려고 안간힘 써도 떠오르지 않는 시간은 빙하기처럼 추운 계절이다. '기억은 신의 선물, 망각은 신의 축복'이라 했듯이 회상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회상의 묘미를 맛볼 수 있기를!

  너무 일찍 날아간 새의
  텅빈 새장을 들여다보듯
  우리는 여기에 남아
  무릎에 묻은 피를 털며
  안녕, 안녕,

'너무 일찍 날아간 새'는 잃어버린 꿈, 잃어버린 청춘이고 '무릎에 묻은 피'는 '지울 수 없는 상처, 미련, 후회'다. 기억과 망각의 기로에 선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끌어안을 것은 끌어안고 작별해야할 것은 작별해 주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지금의 삶을 직시하고 앞으로의 삶을 조율할 수 있다.

  지금 이 순간 영화 '버킷 리스트'에 나왔던 두 가지 질문과 맞선다.

  '생의 기쁨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다른 사람이 생의 기쁨을 느끼게 하도록
   해 준 적이 있는가?'

  올여름의 할일은 버킷 리스트 작성하며 앞으로의 삶을 들여다 보는 일, 그리고 모르는 사람의 그늘을 읽어내고 함께 그늘을 걷어내는 일.[글 양순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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