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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상금의 시방목지](21) 등대의 꿈
[문상금의 시방목지](21) 등대의 꿈
  • 문상금
  • news@newslinejeju.com
  • 승인 2021.05.24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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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는 색깔이다, 낮에는 몸체 색깔로, 밤에는 불빛으로, 안내한다. 어디 색깔뿐이랴, 해무 자욱한 날에는 소리의 색깔로 현재 위치를 알린다. 등대는 언어이다, 미처 말하지 못한 속말을, 안내한다. 몸체로 불빛으로 소리로 위치를 알릴 수 있는 등대는 얼마나 행복한가. 몸짓으로, 눈짓으로, 피범벅인 손짓으로도, 내 위치를 확고하게 알릴 수 없는 나는 너무 적막하여, 스스로 등대가 되었다. 등대가 되어 양팔을 벌리고 서서, 밤낮 텔레파시를 쏘아 올린다, 그대여, 정녕 그리운 그대여, 내 속말들이 들리시는가, 바다로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비상, 그 간절한 함성이 들리시는가.’

등대(燈臺)의 꿈

문상금

얼마나 더 깊어져야
바다가 될 수 있을까

창을 열면
서귀포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는 해조음(海潮音)
그 음(音)과 음(音) 사이로
쉴 새 없이 해초(海草)들이
출렁이는 외진 바위섬,
하얀 등대는 늘 꿈을 키웠지

바람 부는 날은
그리움에 온 몸 떨며
파도에 간간하게 절여져
밤마다 날개를 단 채
추락하는 피투성이의
그 하얀 실선

더 낮게 엎드리면서
마음의 칼을 갈 듯
내 몫의 날을 세워

이 세상 어딘가에 순수(純粹)의
줄긋는 소리 들었지

그것은 어둠을 감아올리는
물레 너머 시퍼런
새벽이 다가오는 소리
희망의 종소리

그리움이 얼마나 깊어져야
바다가 될 수 있을까
이미 등대(燈臺)는
서귀포의 깊은 바다가 되어 있었다
 

- 제4시집 <누군가의 따뜻한 손이 있기 때문이다>에 수록
 

문상금 시인
▲ 문상금 시인 ⓒ뉴스라인제주

미당(未堂) 서정주 시인은 ‘자화상’이란 시에서 ‘애비는 종이었다... 나를 키운 것은 팔 할의 바람이었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라고 이십대 그 팔팔하던 나이에, 피 토하듯, 절규하듯, 시를 적어내려 갔다. ‘자화상’ 이란 제목도 인상적이었지만, ‘나를 키운 것은 팔 할의 바람이었다.’ 란 구절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서, 신문지 여백에 써놓고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다 꺼내보고, 너덜너덜해지면 다시 다른 종이에 옮겨 적어서 또 넣고 다녔던 적이 있다.

서정주 시인을 키운 것은 종이었던 애비도 아니고 어미도 아니고 바로 바람이었다니, 그 환장할 바람, 그것이 얼마나 큰 역풍(逆風)이었으며 고난이며 자유와 방랑이었음을, 나는 잘 안다. 위대한 시인을 키운 것은,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고 고백할 때, 흐느낄 때, 그 헐떡거릴 때마다, 따라붙던 지독하고, 지독한 바람이여.

나를 키운 것은 칠 할은 바다였다. 나는 늘 바다, 바다에 있었다. 바다를 어머니의 깊은 자궁 속 양수라 여겼기 때문에, 늘 아늑했고 편안했다. 서귀포항구 동쪽부두에는, 늘 집어등 불빛이 있어서 좋았다. 그 눈이 아프도록 강렬한 불빛을 나는 ‘그리움의 불빛’이라 불렀다.

어릴 적, 혼불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것은 사람의 혼을 이루는 바탕으로, 죽기 얼마 전에 몸에서 빠져나간다고 하였다, 그 크기는 종발(종지보다 조금 큰 그릇)만 하며 맑고 푸르스름한 빛을 띤다고 하였다. 사람들은 혼불을 목도할 적이면 먼 길을 떠날 불빛을 애도하며 두 손을 모아 망자의 명복을 빌었다고 하였다.

아, 차라리 눈이 멀어도 좋았다. 아아, 차라리 오디세이 왕처럼 눈 먼 채로 광야를 아니 바다를 헤매다 죽어도 좋았다. 밤마다 그리움의 불빛들은 혼불처럼 도체비불처럼 탁탁 타올랐고 때로는 은갈치 떼를, 때로는 한치 오징어 떼를 불러올렸다. 그것들은 죽음인줄도 모르고, 그리움의 불빛 향하여 반짝반짝 춤추듯이 뛰어올랐다. 외로울 때에는 그 불빛 아래에서 등을 동그랗게 말고 잠이 들곤 하였다.

밤낚시를 하는 사람들, 그물에 걸린 생선들을 떼어내어 상자에 넣는 작업을 하던 사람들, 파닥이며 주저앉던 생선들의 마지막 비릿한 몸부림들, 피라미드처럼 쌓여있는 모래더미를 밟으며 달려 올라가면, 3월엔 동쪽부두 넓은 바닥과 어망 위로 온통 가득 앉아있던 흰 괭이갈매기 떼들.

갈매기가 한가득 날아오면 만나자고 했던 친구가 있었다. 나는 매일 일과가 끝나면 서귀포항구에 가 있었고, 조금씩 늘어나는 갈매기 무리들과 놀면서 친구를 기다렸다. 하루, 이틀, 열흘이 지나도록 갈매기 떼는 가득 날아다니는데, 친구는 오지를 않았다. ‘조나단 리빙스턴’처럼 갈매기들은 날아올랐다 내려앉았다, 창작 안무를 추고, 비행연습을 하는가 싶더니, 꼭 내일이나 모레쯤 훅 떠나가 버릴 것만 같아서, 처음으로 전화를 해보았다. ‘야, 갈매기, 떠난다. ~ 야, 갈매기, 떠나려고 한다. ~ 야 ~ 갈매기, 다 떠난다고 ~ 바락바락 악을 썼다.

심장에서 피가 솟고 목에서 피가 날 즈음, 저 멀리서 갈매기처럼 비칠비칠 걸어오는 친구가 보였다. ‘야, 너만 힘들었냐, 너만 망했냐, 나도 시 쓰는 게 힘들고, 살아가는 것도 힘들었지만, 매일 갈매기 기다렸어, 한가득 앉았다가 날아오르는 그 힘찬 비상(飛上)을 너에게 보여주려고 난 기다렸어, 꼭 너한테 보여주고 싶었다구’ 그리곤 부두를 달리기 시작했고 친구도 따라서 달리기 시작했고, 모래더미 꼭대기로 단숨에 뛰어올라가, 양팔을 벌리고 서서, 겨드랑이 속에 꼭꼭 숨겨두었던 날개를 꺼내어 힘차게 펼쳐들었다. ‘자, 힘껏, 날아오르자’ 껑충껑충 하늘로 뛰어올랐다.

흰 괭이갈매기 떼들도 기다렸다는 듯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친구와 나는, 아우성이고, 붉은 피, 토하는, 절규였지만, 그 하얗고 힘차고 눈부신 비상(飛上)을, 한 폭의 그림 같았던 비상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 덕분인지 친구는 쓰러지면 일어서고 또 쓰러지면 일어나서, 아주, 아주, 큰 부자가 되었다.

‘제목은 기억나질 않는데, 어떤 일본소설이 있었어, 한 노동자가 매일 노동을 해서 큰 마대자루 가득 지폐를 모았지 그리고 시장으로 가서는 질긴 호랑이고기 한 근을 사다가, 지폐를 화목(火木)으로 해서, 그 고기를 푹 삶았지, 그리곤 아작아작 뜯어먹는 것이 묘사된 소설이, 이 악물면서, 불태운 지폐보다 몇 백배, 몇 천배 더 많은 돈을 벌리라 맹세하던 주인공처럼, 나 ~, 나도 그런 부자가 될 거야’

‘뭐, 시인이 아니고 부자가 될 거라고? 시를 써야 되는데..., 시를, 손 놓으면 안 돼, 절대 안 되는 거야... 얼마를 모우면 부자가 되는데? 혹시 일억?, 혹시 십억?, 혹시 백억?, 그럼, 너, 혹시 천억이야?’, 비로소 조용히, 씩 웃던, 그 입술 질끈 깨물던 친구의 투지와 집념을, ‘그래 너는 천억을 가진 부자가 꼭 되어라, 매일 기도할게, 나는 따뜻한 밥 세 끼만 먹을 수 있으면 된다, 굶지만 않고 천억 같은 시를 쓸 수 있으면, 난 그것으로 족해’ 그렇게 친구는 부자가 되기 위해서 갈매기 떼처럼 뒤돌아보지 않고 떠났고, 나는 갈수록, 여전히 가난한 시인이 되어, 밤낮 바다를 바라보며, 맴돌며, 시를 썼다.

‘등대의 꿈’ ‘서귀포 항구에서’ ‘겨울바다’ ‘바람의 모습에 대하여’ ‘파도꽃’ ‘숨비소리’ ‘수평선’ ‘이어도에서’ ‘서귀포의 조나단 리빙스턴 갈매기’ ‘서귀포 부두’ ‘바다이야기’ ‘산수국’ 등 바다를 소재로 한 수많은 시들이 태어났다.

특히 '산수국'은  노래로도 작곡되어, 가곡으로 여러번 공연때 불려지기도 하였고 유튜브에서도 조회수가 좀 되는  애창곡이  되었다.

산수국 꽃잎 같이 푸른 바다엔, 친구가 떠난 빈자리마다, 흰 거품들이 물집 되어 떠돌았다, 그 슬프고 아름다운 바다엔, 등대가 있어서 참 좋았다. 등대가 보일 때마다, 친구 이름을 부르듯, 전부 이름을 붙여주었다. ‘갈매기 등대’ ‘돈키호테 등대’ ‘시인 등대’ ‘부자 등대’ 라고, 지치도록 바다에서 등대와 놀다보면 나도 어느새, 눈 흐릿한 고등어처럼 소금물에 간간하게 절여져서, 외진 바위섬, 흰 물결, 해조음 따라, 자꾸만 철썩철썩 흔들거렸다.

서정주 시인이 쓴 ‘자화상’이나 이십대에 그 자유의 방랑벽으로, 서귀포 지귀도(직구섬, 서귀포 남원 위미 앞바다에 있는 섬)에까지 와서 ‘고을라의 딸’을 쓴 그 바람의 강한 흔들림처럼.

그 흔들림 속에서 나는 내가 걸어가야 할 꿈을 키웠다. 비록 추락할 지라도, 피투성이가 될지라도, 마음의 칼을 갈 듯, 등대처럼, 미처 다하지 못한 말들을 언어로 표현하여, 그 누군가에게 따뜻함을 주고 울림을 주는, 그토록 되고 싶었던 시인이, 스물여섯 살에 되었다.

지독한 놈이, 그 지독한 놈이, 여러 개 중앙의 일간지 신문을 장식하기 시작했다. 기라성 같은 중앙의 여러 신문에 신춘문예 당선을 해마다 하고 각종 문학상도 수상한다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손 놓지 않았구나, 이 악물고, 끝내 모든 것을 이루어 가는구나.’, ‘잘 하였다, 아주, 아주, 잘 하였다.’

오늘도 내 마음의 바다엔 흰 갈매기 떼, 그 중 하늘로 비상하는, 유독 힘차고 다부진 날개를 가진 한 마리, 늘, 날아오른다. [글 문상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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