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6 07:41 (금)
[자청비](16) 단순해도 괜찮아
[자청비](16) 단순해도 괜찮아
  • 박미윤
  • jeju@newslinejeju.com
  • 승인 2021.04.22 01: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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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윤 소설가
박미윤 소설가
▲ 박미윤 소설가 @뉴스라인제주

동네 마을 문고에서 책갈피 만들기 체험을 할 때의 일이다. 내가 준비해 간 한지 위에 회원들이 자기 개성을 발휘하여 독특한 책갈피를 만들었다. 내가 만든 견본 책갈피에 그림과 함께 시가 쓰여 있었기 때문에 몇몇은 인터넷을 검색하여 잠언이나 위대한 인물의 명언, 시구 등을 찾아서 적었고 그림을 그려놓기도 했다. 그러다 한 남자 회원의 책갈피에 우리는 모두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그는 수려한 펜글씨로 딱 다섯 글자를 책갈피에 적어놓았다.

‘이만큼 봤네’

그 남자 회원은 책갈피의 가장 단순한 용도인 여기까지 책을 봤다는 뜻만이 아니라 아무리 두꺼운 책이라도 ‘이만큼 봤네’라고 자기를 다독이면서 책을 읽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그러자 회원들이 다투면서 자기도 그 글을 써달라고 부탁했고 나도 하나를 얻었다. 지금도 두꺼운 책을 읽을 때면 코팅된 그 다섯 글자의 책갈피를 애용하고 있다.

위의 책갈피의 예처럼 단순한 것이 울림을 줄 때가 있다. 시를 배울 때 선생님이 지적했던 것 중의 하나가 불필요한 형용사의 남용에 대한 것이다. 지적을 받고 나서 고급스럽게 쓴 내 형용사를 아까워하며 버리고 나면 그만큼 시가 더 긴장이 있고 산뜻해져 있었다.

단순함의 추구는 생활 속에도 퍼지고 있다. ‘미니멀리즘, 버리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곤도 마리에: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라는 다큐멘터리를 보면 미니멀 라이프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신박한 정리’를 가끔 보는 편인데 어지러웠던 물건들을 싹 정리한 후의 집은 마치 다른 집을 방문한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만큼 변했다. 그런 변화는 비우는 것에서부터 출발했는데 언젠간 쓰겠지, 하고 쌓아놓은 물건들은 언젠가 쓸 일이 없으며 공간만 차지한다는 걸 느끼게 했다.

‘신박한 정리’를 본 후, 쓰지 않는 물건을 쌓아두기만 해서 잡동사니에 치어 진을 빼앗기는 삶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몇 년 동안 입지 않는 옷들과 밭에라도 신고 다닐까 하고 모셔두었던 신발들, 있는 줄도 몰랐던 서랍 속 잡동사니들을 정리하게 됐다. 그러나 그것들을 버렸다고 해서 지금까지 후회하거나 불편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도리어 비운 만큼 공간이 쾌적해진 것 같았다.

현대 사회는 점점 더 복잡해지고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사람들은 길을 잃기도 한다. 끝없이 넘쳐나는 물건들과 복잡한 인간관계에 피로를 느끼는 사람들이 비우는 삶, 단순한 삶에 매료되는 것이다.

단순하게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덕지덕지 가식으로 치장하여 자신을 옭아매지 말고 삶의 핵심에, 내가 가장 열정을 쏟을 수 있는 것에 집중하며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단순해도 괜찮아.

이렇게 속삭이며 나와 같이 현대 사회에 지친 사람들의 어깨를 토닥토닥 토닥여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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