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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상금의 시방목지](77) 보리밭
[문상금의 시방목지](77) 보리밭
  • 문상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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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06.23 09: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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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하고 부르면, 삘릴리, 보리피리, 삘릴리, 피리소리가 난다, 애잔하고 구슬픈, 그 질기고 질긴 목숨 소리들’ ’
 

보리밭
 

문상금
 

아아, 숨 막혀라

구름 한 자락
산 넘어가고
더 이상
바람도 깃들지 않았다

간혹 거짓말처럼
산꿩이 울었다

손 흔들면 대답할 듯
이 짙은 보리누름

산새 한 마리
날아오지 않는다
 

-제1시집 「겨울나무」에 수록
 

문상금 시인
▲ 문상금 시인 ⓒ뉴스라인제주

보리밭에 와 섰다. 아아, 숨 막힌 이 절정, 작은 언덕 위로 산새 한 마리 날지 않는다. 간혹 거짓말처럼 뽀얀 속눈썹 사이 눈발인 듯 희끗희끗 날리고 뿌리 끝이 시퍼런 꿈, 인고의 세월 때로 내 발 밑에서 더 짙어가는 보리밭.

드넓은 수만의 보리밭은 하늘로 푸르른 손 흔들며 보리패기 시작했다.

제주의 보리밭과 돌담은 참 찰떡궁합이다, 어우러짐이 한창이다, 물결은 바다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서, 푸르고 흰 큰 물결 작은 물결이 일 때면, 내 마음도 후련해지는 것이었다.

아마 보리이삭들이 무리지어 흔들릴 때면 그 수염처럼 거친 것 같으면서도 또 한 편으론 화가의 정열적인 붓의 움직임처럼 그리고 배 아플 적 하염없이 배를 쓸어주시던 어머니의 따뜻한 손처럼 보리물결도 그러한 좋은 느낌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마치 잔잔히 마음을 쓸어주는 듯 이렇게 바라만 보아도 평화를 느끼는 것이리라.

해마다 갓 수확한 보리로 만든 미숫가루가 집 구석구석에 놓여 있곤 하였다, 물에 타 시원한 음료로 마시기도 하고 밥에 버무려 고소하게 먹기도 하였다. 갓 볶아낸 보리의 구수함과 달달함이 입맛을 당겼다. 소화가 늘 잘 되었고 친구들과 뛰어놀고 있으면 여기서 뽕 저기서 뽕 너나없이 방귀대장들이 되는 것이었다.

지금도 간혹 시장에서 미숫가루가 보이면 꼭 한두 봉지 사와서 주식으로 때로는 간식으로 글 쓰는 틈틈이 먹는다. 입맛이 변하였는가, 어릴 적 그 맛은 아니라도 밥 다음으로 즐겨 먹는다.

흰 눈 내리는 겨울 보리밭을 바라볼 때에는 사뭇 걱정이 되기도 하였다, 살짝 눈 쌓인 보리 사이로 언 흙들이 서걱하고 올라와 있는 것이었다. 그러면 동네 어르신들은 ‘밟아주라, 꼭꼭 밟아주면 된다’ 하고 말씀 하시는 것이었다. 이 부드러운 보리 새순들을 ‘어떻게 밟누’하고 그냥 바라보고 있으면 ‘걱정 말라, 보리는 꼭꼭 밟아주어야 잘 살아난다, 그만큼 질긴 거여’ 하셨다.

어린 귤 묘목을 심을 때도 그랬다, 수만의 해동의 들녘에선 늘 어린 귤 묘목들을 심느라 매년 삼월은 정신없이 분주했다, 수십 명의 일꾼들 사이를 종횡무진하며 ‘꼭꼭 밟으라, 뿌리와 흙이 한 몸이 되도록 꼭꼭 밟으라’ 나도 덩달아 줄지어 갓 심어진 어린 묘목을 하나하나 꼭꼭 밟아주곤 하였다.

그럴 때 아버지나 할아버지나 동네 어르신 같은 분들의 그 힘찬 해동의 들녘을 쩌렁쩌렁 깨우는 목소리는 흡사 장군의 호령소리 같아서, 나는 ‘장군 같다, 대장군 같다’ 하며 덩달아 신이 나는 것이었다. 그렇게 심어 삼년이 지나면 정말 황금 같은 감귤들이 주렁주렁 달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제주의 보리밭이나 넓은 감귤 밭에서 들렸던, 그 ‘꼭꼭 밟으라’는 내게로 와서 쩌렁쩌렁 아주 큰 힘이 되곤 하였다. 삶과 삶의 경계 사이에서 피투성이 같은 전쟁들이 일어날 때마다, 그 겨울 보리를 밟아주듯, 어린 묘목들을 밟아주듯 나는 내 마음을 다잡아 꼭꼭 밟아주곤 하였던 것이다.

올해 보리이삭이 필 무렵, 문둥이 한하운 시인의 1955년 제2시집 ‘보리피리’를 서울의 수집가가 소장한 것을 간절히 부탁하여 수집하게 되었다. 그 낡은 책표지에 적혀있는 ‘보리피리’란 제목만 보아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 ― 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靑山)
어린 때 그리워
피 ― 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人寰)의 거리
인간사(人間事) 그리워
피 ― 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 ― ㄹ 닐니리

한하운 시인의 ‘보리피리’ 전문이다. 이 시는 조념 작곡가에 의하여 가곡으로 작곡이 되어 불려졌다.

‘이 세상은 온 들판이 학교이고, 온 시장이 학교이다’ 내 회색노트에 적어놓은 한 문장이다. ‘꼭꼭 밟으라’ 도 그 옆에 나란히 적혀 있다. 밟을수록 더 강해지는 목숨들이, 그 질긴 것들을 위하여 시를 쓰곤 한다. [글 문상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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