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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순진의 시의 정원](33) 칠 일
[양순진의 시의 정원](33) 칠 일
  • 양순진
  • jeju@newslinejeju.com
  • 승인 2020.11.02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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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률 시인
▲ 이병률 시인 @뉴스라인제주

칠 일

 이병률

칠 일만 사랑하겠다.

육 일이 되는 날 사랑을 끝내고
뒷 일도 균열도 없이 까무룩 잊고 싶다

완전히 산산이 사랑하겠다
문드러져 뼈마디만 남기고 소멸하겠다
칠 일이 되는 날
꽃나무 가지 하나 꺾어 두 눈을 찌르고 눈이 멀겠다
까맣게 먹먹하겠다

헤아릴 무엇도 남기지 않도록 지문을 없애겠다
눈이 맵도록 이불까지 유리잔까지 불사를 것이며
칠 일 동안의 정확한 감정은 절벽에 안겨 떨어지리라

칠 일이 지난 새벽부터 폭우 내리고
그 홍수 닿는 곳에서 숲이 시작된다
그리고 어떤 자격으로 첫 번째 해가 뜬다
사라질 것들을 다시 시작한다고 해서
다시 그 사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문학동네, 2020. 9
 

양순진 시인
▲ 양순진 시인 @뉴스라인제주

작년 겨울 조천 '시인의 집'에서 <바다는 잘 있습니다> 낭독회로 찾아왔던 이병률 시인, 여름 내내 <바다는 잘 있습니다> 시편들을 뒤적거리는 사이, 가을 은행잎 같은 노란 표지의 시집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로 다시 다가왔다.
 
  '눈보라가 칩니다/ 바다는 잘 있 습니다/ 우리는 혼자만이 혼자만큼의 서로를 잊게 될 것입니다//'라며 떠났던 '이별의 원심력'이 3년 사이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며 역설적 표현으로 속살거리며 이 가을, 독자들의 가슴팍으로 파고든다. 달콤한 솜사탕 같은 시어들,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비밀의 감정들을 다 아는 듯 우주적 비밀의 열쇠로 능수능란하게 꺼내주는 감각적 싯구들, 그 누구도 따라갈 재간이 없다.

  시집 제목, 차례에 나온 시 제목만으로도 시가 되는 희열!

  눈물이 온다
  슬픔이라는 구석
  숨
  사라지자
  한 사람이 남기는 것은, 오로라
  단추가 느슨해진다
  사람의 금
  글씨들
  자유의 언덕
  어떤 나이에 대한 걱정
  비밀이 없으면 우리들은 쓰러진다지
  실
  여행

  특히 '칠 일'은 다른 시처럼 주변을 맴도는, 애매모호한, 상상 불가능한, 비밀에 휩싸인 내용이 아니라 화자의 확고한 신념이 드러나 있다. 그래서 부드러운 시보다 다른 분위기가 감돈다. 결구들이 거의 '-겠다'나 '-싶다', '-리라'로 마무리 되고 있다.

  그러나 이 시 역시 역설적 표현으로 읽힌다. '칠 일만 사랑하겠다'나 '까무룩 잊고 싶다', '눈이 멀겠다', '까맣게 먹먹하겠다' 등의 표현은 강한 의지로 보이나 '영원히 사랑하겠다', '영원히 기억하겠다', '눈에 담아두겠다', '점점 생생하겠다'라는 역해석으로 음미할 수 있겠다.
  김소월 '진달래꽃'의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와 동일한 정서다.
  이병률 시인의 사랑과 이별은 지극히 긍정적 마인드다. '완전히 산산이 사랑하겠다' 그리고 사랑이 끝나고 '뒷 일도 균열도 없이 까무룩 잊고', 이별이 끝나는 자리에 다시 '첫 번째 해가 뜬다'고 희망한다.

  그리고 '칠 일의 정확한 감정은 절벽에' 버리고 숲이 될 때까지 많은 광채들을 안고 가만히 견디겠다고 고백한다.

  이별은, 슬픔은 그에게 더 이상 짐이 아니다.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해도, 슬픔이 내일 만나자고 해도 그는 기꺼이 운율을 일으키며 대문을 나선다. [양순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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