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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순진의 시의 정원](32) 가을의 향기
[양순진의 시의 정원](32) 가을의 향기
  • 양순진
  • jeju@newslinejeju.com
  • 승인 2020.10.23 09: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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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신 시인
▲ 김항신 시인 @뉴스라인제주

가을의 향기
     -용눈이오름

김항신


용의 등 밟고 걸어간다
야자수 매트가 곡선 따라 이어지고
등허리에 듬성듬성 돋은 비늘처럼
억새들이
늦가을 칼바람에 제 몸 맡기고 있다
포근하게 엎드린 능선 따라
물매화 쑥부쟁이 꽃향유*가 피어 있다

꽃향유

다만 보랏빛 입술로 유혹한다고
나는 막연한 오해를 했었다

그러나
여린 살을 슬쩍 어루만지는 순간
은은하게 풍겨 나오는 너의 냄새
너는 가을의 향기를 몸속에 품고 있었다
늦가을 물기 마른 햇살 아래
가을의 향기를 품어내고 있었다


*꽃향유의  꽃말은 '가을의 향기'


            - 시집 <꽃향유>, 책과나무, 2019
 

양순진 시인
▲ 양순진 시인 @뉴스라인제주

꽃향유의 계절이다. 꽃향유의 꽃말이 '가을의 향기'인 것은 가을의 여왕이란 의미로 읽힌다. 무릇, 쑥부쟁이, 여뀌, 달개비가 지천에 피었어도 꽃향유의 자태와 향기를 따를 야생화는 없다는 듯 가을 들판 가득 꼿꼿이 서 있다.

  이 시는 꽃향유의 숨겨진 속내를 꺼내보려 애쓴 흔적이 보인다. 이름과 꽃말보다 더 깊은 곳에 숨겨진 진실, 그것은 시인의 자아와 동일하다. 아무리 겉치장 한 자신을 숭배한다 해도 그것이 다는 아니다. 안에 감춰진 채 몽글몽글 피어나는 원초적 자아를 알아주길 원한다.

  계절의 여왕은 그래서 고독한 것이다. 바람에 꺾이고 빗물에 눈물 고여도 끝끝내 피워낸 시인이라는 운명의 꽃, 그 꽃의 내면은 오해와 상처와 제 생을 다 갉아먹은 고통의 향연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을의 향기를 몸속에 품고' 견뎌내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오늘도 절뚝거리는 걸음걸이로 용눈이오름 오른다. '늦가을 물기 마른 햇살 아래/ 가을의 향기 품어' 내며 멈추지 않고 지친 순례길에 나서는 것이다. 자기를 닮은 꽃향유와 조우하며 쓰다 만 자서전의 결미를 완성해 가는 저 집요함이라니! 용이 되기 직전의 이무기처럼. [양순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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