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9 15:38 (월)
[양순진의 시의 정원](31) 녹슨 빛깔 이파리의 알펜로제
[양순진의 시의 정원](31) 녹슨 빛깔 이파리의 알펜로제
  • 양순진
  • jeju@newslinejeju.com
  • 승인 2020.10.09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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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라이너 쿤체
▲ 시인 라이너 쿤체 @뉴스라인제주

녹슨 빛깔 이파리의 알펜로제

라이너 쿤체

꽃피어야만 하는 것은, 꽃핀다
자갈 비탈에서도 돌 틈에서도
어떤 눈길 닿지 않아도

-류시화 <마음챙김의 시>, 수오서재, 2020
 

양순진 시인
▲ 양순진 시인 @뉴스라인제주


  코로나 이전의 사고법은 '보다 복잡하게, 보다 거창하게, 보다 깊이 파고 파고, 보다 많이 비축하기'였는데 코로나 이후는 정반대다. 간단하게, 천천히, 줄이고 또 줄이기.

  사방에 코로나라는 지뢰가 있어 실내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아진 2020년, 우리는 스스로를 챙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돌볼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 닥쳐온 폭풍, 우울과 고독!

  이런 코로나 블루 시대에 시 읽기는 최고의 치유법이다. '날개를 주웠다, 내 날개였다.'처럼 시를 읽는 것은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것이고, 세상을 경이롭게 여기는 것이고, 여러 색의 감정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류시화는 말한다. 명상시인 류시화가 엮은 <마음챙김의 시>는 짧지만 인생의 지혜가 번뜩이는 시들로 가득하다. 이 책 하나로 라이너 쿤체라는 독일 현존 최고의 서정시인을 알았고, 알펜로제와 은엉겅퀴라는 희귀한 식물을 알게 되었다. 그 누군가에겐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본인에겐 보물 같은 것들이 있다. 새로운 시, 꽃, 동물 등이 내겐 그렇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은 2020년, 빈털터리인 것 같은 2020년, 라이너 쿤체의 '녹슨 빛깔 이파리의 알펜로제'라는 이 짧은 시 한편은 잠자고 있는 자아에게 커다란 채찍질을 해준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자신에게 '꽃피어야만 하는 것은, 꽃핀다'라는 확신감에 찬 한 줄로 번개 같은 가르침을 던져준다.

  '자갈 비탈에서도 돌 틈에서도', 그 어떤 환경에서도 멈추지만 않는다면, 쓰러지지만 않는다면, 반드시 피어나는 인류.
  '어떤 눈길 닿지 않아도', 그 누군가가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저마다 숨결로 노래한다면 충분히 살아가는 이유로 족하다고.

  알프스와 피레네 산맥을 붉게 물들이는 철쭉 종류의 알핀로제는 수목한계선 부근에서 자라며 누가 봐주지 않아도 때가 되면 눈 속에서도 꽃을 피운다. 그래서 '눈 속 장미'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지금 우리는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라이너 쿤체가 노래한 '뒤처진 새'일 뿐이다. 반드시 언젠가는 먼 곳으로 비상하게 될 새 떼들.

  라이너 쿤체의 또 다른 식물의 시 '은엉겅퀴'는 코로나 시대의 생존법을 알려주는 듯하다.

    뒤로 물러서 있기
    땅에 몸을 대고

    남에게
    그림자 드리우지 않기

    남들의 그림자 속에서
    빛나기

  지금 우리는 녹슨 빛깔 이파리의 알펜로제이지만, 땅 위에 납작 엎드린 은엉겅퀴이겠지만, 잠시 비행법 습득하는 뒤처진 새일 수 있겠지만 인간은 인생의 흉터들을 덮을 희망을 갖고 태어난 존재다. 서로가 서로에게 힘을 보내자. 구름 속 저 바람처럼. [양순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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