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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순진의 시의 정원](30) 가을의 노래
[양순진의 시의 정원](30) 가을의 노래
  • 양순진
  • jeju@newslinejeju.com
  • 승인 2020.09.24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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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보들레르
▲ 시인 보들레르 @뉴스라인제주

가을의 노래

 보들레르

1

머지않아 우리는 차가운 어둠 속에 잠기리;
안녕, 너무 짧았던 우리 여름의 찬란한 빛이여!
내겐 벌써 들린다, 음산한 소리 울리며
안마당 돌바닥 위에 떨어지는 장작 소리.

분노, 미움, 떨림과 두려움, 그리고 강요된 고역,
이 모든 겨울이 이제 내 존재 속에 들어오면,
내 가슴은 지옥 같은 극지의 태양처럼
얼어붙은 붉은 덩어리에 지나지 않으리.

나는 듣는다, 몸을 떨며, 장작개비 떨어지는 소리 하나하나;
교수대 세우는 소리도 이보다 더 음산하지 않으리.
내 정신은 지칠 줄 모르고 쳐대는 육중한 망치질에
허물어지고 마는 탑과도 같아.

이 단조로운 울림소리에 흔들려
나는 어디선가 급히 관에 못박는 소리 듣는 것 같다.
누구를 위해서인가? ― 어제만 해도 여름, 그러나 이제 가을!
저 신비한 소리는 출발을 알리는 신호처럼 울린다.


ㅡ보들레르 시집 <악의 꽃>, 윤영애 옮김, 문학과지성사

양순진 시인
▲ 양순진 시인 @뉴스라인제주

  가을이다. 봄에는 코로나 열병, 여름에는 태풍 열병, 가을이 오자 코로나, 태풍보다 더 강한 고독이라는 열병이 잠입한다. 소녀 시절부터 보들레르를 알았으니 그의 대명사인 고독, 우울, 절망, 악(惡), 환상, 죽음이라는 낱말들이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그의 대표작  <악의 꽃>, <파리의 우울> 제목만 봐도 이미 예상된다. 그러나 그 반대편 세계인 여행, 사랑, 자아, 시에 대한 열망도 남달랐다.

  시 '여행'에서 그는 노래한다. '지옥이건  천국에건 아무려면 어떠랴/심연 깊숙이 / 미지의 바닥에 잠기리라,/ 새로운 것 찾기 위해//'
  36세에 초판, 40세에 재판한 시집 <악의 꽃>에서도 그는 고백한다.
  '이 끔찍한 책에다 나는 내 생각 모두를,내 마음 모두를, 내 종교 모두를, 내 증오 모두를 집어 넣었다.'

   이 시 '가을의 노래'는 온전히 초조하고 불안한 가을의 상념을 노래한 것 같지만 그가 '수호천사'라 부르며 사랑했던 푸른 눈의 여배우 마리 부뤼노에게 바쳐진 작품이다. 그 사랑과 이별을 암시하는 내용은 2부에 묘사되지만 여기서는 가을에 대한 1부만 소개한다.

  19세기 프랑스에서도 가을이 되면 겨울을 위해 땔감을 준비하나 보다. 만추의 어느 날 저녁, 서른여덞의 시인은 죽음의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 그래서 안뜰에서 들려오는 장작 패는 소리도 다가오는 겨울과 어둠과 추위와 그리고 마침내 다가올 죽음을 알리는 환각을 가져다 줄 뿐이다.

  가을의 소리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악마적인 위력을 발휘하여 인간의 정신적인 열망마저 시들게 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존재에는 추위, 증오, 분노가 말해주는 절망이 자리잡고, 마음은 극지에 얼어붙어 타지 않는 태양에 비유된다. 그리고 정신은 육중한 망치질에 허물어지는 탑으로 비유하고 있다.

  심지어는 관에 못 박는 환청까지 듣는다. 누구를 위하여 이렇게 아파야 하는가. 나에게 희망이란 없는 것인가. 어제만 해도 뜨거운 여름이었는데 오늘은 모든 사랑과 열망이 사그러드는 가을, 지나가버린 시간은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 또 닥쳐올 겨울이 음울하고 불길한 예감으로 다가온다. 누군가의 손을 잡고 싶다.

  그러나 추락하는 모든 것에는 날개가 있지 않은가. 저 신비한 소리들, 다시 새로운 길을 열어주는 출발의 신호음이 아닐까.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보들레르는 <악의 꽃> 재판 이후 명성을 얻고 강연 여행으로 이어지다가 건강 악화로 파리에 입원하고 실어증까지 얻어 46세에 사망한다. 그리고 파리 퐁파르나스 묘지 오피크家 무덤에 안치된다.

  그는 만년의 수기들을 <내심의 일기>라는 제목으로 출판한다. 보들레르의 서정시는 다음 세대인 베를렌, 랭보, 말라르메 등 상징파 시인들에게 크나큰 영향을 준다. 발레리는 말한다. '그보다 위대한 재능이 풍부한 시인들은 있을지 모르지만 그보다 중요한 시인은 없다.'  '취하세요', '새벽 한 시에', '인공낙원', '상응', '백조', '태양' 등은 나의 애송시들이다.

  미술평론가로 데뷔하여 문예비평, 시, 단편소설, 번역 등을 섭렵하며 짧은 생을 살다가 간 시인 보들레르! '악'을 아름다움으로 승화한 그를 연구한 문헌들이 1만여 권을 넘는다는 것은 그의 문학성, 세계성, 현대성, 위대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는 증거다.

  이 가을, 보들레르가 사랑한 오묘한 구름들을 자주 본다. 핸드폰 갤러리에 가득 담는다. 그것만으로도 삶의 위안이 된다. 보들레르가 추구한 자연의 세계에 눈 돌리고 각자의 자리에서 출발의 신호음을 들어보자.

  '자연은 하나의 사원, 그 살아있는기둥들/ 정신과 감각의 양양을 노래할/ 용연향, 사향, 안식향, 훈향처럼/ 무한한 것들의 확산력을 지닌 향기도 있다.// (보들레르의 시 '상응(相應)' 中) [양순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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