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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순진의 시의 정원](28) 그 여름의 끝
[양순진의 시의 정원](28) 그 여름의 끝
  • 양순진
  • jeju@newslinejeju.com
  • 승인 2020.09.03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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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복 시인
▲ 이성복 시인 @뉴스라인제주

그 여름의 끝

이성복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양순진 시인
▲ 양순진 시인 @뉴스라인제주

  여름의 끝자락에서 이성복의 '그 여름의 끝'을 읽는다. 밤새 태풍 마이삭의 횡포를 뜬눈으로 지켜보다가, 새벽녘 서서히 물러나는 뒷모습 보이자 잠시 눈 붙였다.

  그리고 잠잠해진 아침 눈 뜨자마자, 얼른 집앞 공원으로 달려나갔다. 배롱나무에 핀 분홍 백일홍의 안부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집앞에 공원이 있다는 건 정원 있다는 것처럼 마음 넉넉한 행운이고 벚나무 네 그루, 때죽나무 네 그루, 담팔수 네 그루, 베롱나무 네 그루가 봄에서 여름 끝날 때까지 차례차례 꽃을 피우는 광경을 보여줘서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라 여기며 산다. 힘들 때마다 내 어깨를 토닥거려주는 꽃나무, 바비와 마이삭이 차례로 덮쳤는데도 다행히 그대로다.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 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을 매달았습니다'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남해금산>으로 잘 알려진 이성복 시인의 빛나는 시 앞에서 입다물게 된다. 세월이 흐른 뒤 다시 읽어도 감탄하게 되는 시가 진짜 시가 아닐까. 물론 더 아끼는 책은 <이성복 아포리즘 :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다. 읽고 읽어도 어느 것 하나 가볍지 않은 채찍질이다. 누렇게 변질된 책을 보물처럼 애지중지 한다.

  이 시는 1연의 주체가 '백일홍', 2연의 주체는 '나', 3연의 주체는 '대상과 내가 하나'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시를  종종 연애시로 보는 경향도 있는데, 백일홍처럼 폭풍을 이겨낸 화자의 의지를 은유적으로 끌어내고 초현실적으로 표현한 시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 여름, 화자의 절망은 무엇이었을까. 1차적 절망은 그 해 시적 운명의 대상인 김현 교수의 죽음이다. 2차적 절망은 시적 체제가 바뀌는 변곡점일 수 있다. '폭풍', '우박', '불', '피'로 물들인 그 절망 이후 <래여애반다라>라는 성찰적 시집을 출간한다.

  이 시에서 주목할 점은 '피로 덮는 절망'처럼 어둡고 어두운 시적 분위기에 '장난처럼'이라는 어절을 과감하게 장치하는 기법을 사용한 부분이다. 인간은 작은 아픔에는 민감하고 커다란 아픔 앞에서는 오히려 덤덤해지는 법이다. 화자는 큰 절망일지라도, 그 어떤 장애물일지라도 더 밝은 미래를 위하여 과감히 뛰어넘겠다는 것이다. 폭풍을 견딘 목백일홍처럼, 결국 지상을 피로 물들었다 해도, 다시 올 봄과 여름을 위하여 당당하게 받아들이겠다는 암시다.

  드라마 '화양연화'에서 유지태(재현 선배)가 이보영(윤지수)에게 선물하면서 다시 한 번 독자의 마음을 적신 이 시집! 우리들의 힘겨웠던 어느 한 때도 이 시처럼 불쑥 떠올라 한 시대를 백일홍처럼 분홍빛으로 증명할지 모를 일이다. [양순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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