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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순진의 시의 정원](23) 금강초롱꽃
[양순진의 시의 정원](23) 금강초롱꽃
  • 양순진
  • jeju@newslinejeju.com
  • 승인 2020.07.22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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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일 시인
▲ 부정일 시인 @뉴스라인제주

금강초롱꽃

 부정일

차마, 못 쓰겠네
허우대 멀쩡하다고
나보고 글로 써 보라 하니 찔려서 못 쓰겠네

토란잎에 구르는 방울 같은 걸
진흙이 쏘아 올린 연꽃 같은 걸
아무도 가 닿지 않은 산골짝
금 간 바위
한 방울씩 떨어지는 수정 같은 걸

욕망과 집착, 다 비우지 못한
때 묻은 마음으로 어찌 쓰겠니
석삼년 돈내코* 시린 물에 담갔다가
서너 번 패대기치면 행여 모를까

나보고 쓰라 하니, 하늘이 보고 있잖니
눈 감아 야옹 하고 어찌 쓰겠니
차마, 못 쓰겠네


*돈내코: 서귀포시에 있는 물이 아주 차가운 계곡.


- 시집 <허공에 투망하다>, 한그루, 2017
 

양순진 시인
▲ 양순진 시인 @뉴스라인제주

  누구나 첫 시집은 시인의 첫사랑 같기도 하고, 첫 딸 같기도 하며, 시인의 역사 같기도 한 개인사 및 가족사로 엮게 마련이다. 부정일 시인의 첫시집 <허공에 투망하다> 역시 '아내'라는 시를 시작으로 누나의 이야기인 '상처', 할아버지 이야기인 '담배', 아버지 이야기인 '막둥아, 물~', 그리고 어머니 이야기인 '어머니 때문이다'가 부분 부분에 다 실려 있다. 딸, 아들, 반려견, 세월호, 4.3에 대한 이야기도 담겨져 있고 그 외의 시에도 모두 살아가면서 접하게 되는 기쁨, 슬픔, 허무, 사랑, 그리움이 피어나는 일상들을 시편으로 승화시켰다.

  '금강초롱꽃'은 시인의 시적 정신이 드러난 시다. '메밀촌'을 운영하며 시의 세계로 입문한 그는 성실한 사업 정신처럼 시를 대함에 있어서도 끈질지게 파고들고 시회 할 때마다 신작시를 반드시 내미는 성실함을 보여줬다. 그리고 그 신생아 같은 시를 고치고 고치며 어린아이처럼 들떠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단 한 번도 시에 대해서는 굽힐 줄 모르는 도전의식이 있었다. 그 열정이 <허공에 투망하다>의 탄생비화가 된 것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금강초롱꽃의 꽃말이 '충실과 정의'다. 우연일까, 운명일까. 그는 매사에 긍정적이며 타인을 배려하고 누구에게든 에너지를 전파하는 정의꾼이다.

  '차마, 못 쓰겠네'라는 대목을 보라. 잘 쓰든 못 쓰든 거침없이 대범하게 휘갈기는 것이 대부분 시인들의 특징이고, 본인 또한 터프하게 밀어붙이면서도 시인은 '시'라는 것이 조심스럽고, 떨리고, 보배스럽고, 귀하다 여기며, 본인이 감히 쓸 수 있을까, 갈등하는 마음이 숨겨져 있다. 그러면서 시 쓰는 행위를 다음과 같이 비유한다.

  토란잎에 구르는 방울 같은 걸
  진흙이 쏘아올린 연꽃 같은 걸
  아무도 가 닿지 않은 산골짝
  금 간 바위
  한 방울씩 떨어지는 수정 같은 걸

  마치 이백이나 두보의 한시漢詩처럼, 부처의 말씀처럼, 고려 말 고승 나옹선사의 시 같은 명문장을 남겼다. 한 번 비교해 보자.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람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은 바람같이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은 연꽃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부처의 말씀 中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 같이 바람 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 나옹선사의 시 中

  이렇게 위대한 시와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다. 어떻게 저런 멋진 표현을 낳았을까. 앞으로 위의 표현을 능가할 일생일대의 표현을 건져낼 수 있을까, 의문이다.
  '차마, 못 쓰겠네'는 반어적 표현이다. '석삼년 돈내코 시린 물에 담갔다가/ 서너 번 패대기하면'서라도 시에 득도하고픈 간절함이 보인다. '눈 감아 야옹'하고서라도 시의 벽을 뛰어넘고 싶다는 애절함이 엿보인다.

  나는 하루 중에 황혼녘을 가장 좋아한다. 인생의 일출과 대낮을 다 견딘 후 맞는 황혼은 얼마나 아름답고 위대한가.    '메밀촌'의 전설은 끝났으나, 시의 여정은 현재진행형이다. 황혼의 시기에 시를 벗 삼아 삶을 향유하는 부정일 시인은 백발이면서도 정신만은 또 얼마나 젊고 당당한가.

  오늘도 현재 거주지인 거로를 벗어나 서귀포 돈내코로 시를 담금질하러 길 떠났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그의 근원지인 종달리로 자신의 뿌리를 찾아 훌훌 떠났을지도 모른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 금강초롱꽃 웃는다. [양순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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