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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순진의 시의 정원](17) 고래 해체사
[양순진의 시의 정원](17) 고래 해체사
  • 양순진
  • jeju@newslinejeju.com
  • 승인 2020.06.12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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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위훈 시인
▲ 박위훈 시인 @뉴스라인제주

고래 해체사

박위훈

만년의 잠영을 끝낸 밍크고래가
구룡포 부둣가에 누워있다

바위판화 속 바래어가는 이름이나
호기심으로 부두를 들었다 놓던 칼잡이의 춤사위이거나
잊혀지는 일만큼 쓸쓸한 것은 없다
허연 배를 드러낸 저 바다 한 채,
숨구멍이 표적이 되었거나
날짜변경선의 시차를 오독했을지도 모를 일
고래좌에 오르지 못한 고래의 눈이
칼잡이의 퀭한 눈을 닮았다
피 맛 대신 녹으로 연명하던 칼이
주검의 피비린내를 잘게 토막 낼 때면
동해를 통째로 발라놓을 것 같았다
조문은 한 점 고깃덩이나 원할 뿐
고래의 실직이나 사인(死因)은 외면했다
주검을 주검으로만 해석했기에 버텨온 날들이
상처의 내성처럼 가뭇없다
바다가 고래의 난 자리를 소금기로 채울 동안
고래좌는 내내 환상통을 앓는다
테트라포드의 느린 시간을 낚는다
주검의 공범인 폐그물도 인연이라고
수장된 꿈과 비명 몇 숨 그물에서 떼어내자
반짝, 고래좌에 별 하나 돋는다

바다의 정수리
늙은 고래의 흐린 동공에 맺힌 달,
조등이다

-2020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양순진 시인
▲ 양순진 시인 @뉴스라인제주

멸종 위기의 동물 밍크고래의 죽음 앞에서 치러지는 인간들의 이기적 행동을 안타깝게  응시하는 시인의 시선이 클로즈업 된다. 밍크고래 한 마리 값이 8000만원, 1kg에 15만원 한다는 신문기사를 읽었을 때 아릿했다. 고래의 사인(死因)보다 고래고기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의 냉혈성에 움찔했고 고래가 버티지 못한 바다의 살냄새가 지독하게 슬픈 역사로 해독되었다.

  뇌경색과 편마비를 겪은 박위훈은 절망의 시간을 詩에게 고스란히 뱉어놓았다고 고백한다. 그의 시에게 '버틀러는 ‘애도’는 슬픔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슬픔에 잠겨 슬픔이 내가 되게 하는 거라고 했다. 이 세계에서 떠밀려지는 존재들과 접촉하며 상처받고 통제할 수 없이 슬퍼하는 자가 시인이 아닐까? 당선작이 기성의 시들처럼 다소 숙련화된 이미지를 보여주는 점이 아쉬웠으나 패배감으로 끝내지 않으려는 몸부림을 높이 보았다.' 라고 심사위원 배한봉•김이듬 시인은 평했다.

  밍크고래의 주검 앞에 '동해를 통째로 발라놓을 것 같다'고 시인은 내뱉는다. 그리고 고래의 환상통 시간을 소금처럼 거침없이 뿌려댄다. 고래의 주검도 고래좌에 오르려는 시인의 투쟁도 눈물겹다.

  나, 단 한 번이라도 죽음과 대적한 적 있던가. 혹은 치열하게 달에 오르려 동아줄 맞잡은 적 있던가. 너무 낙관하고 너무 안이하게 살고있지 않은가. 밍크고래의 덧없는 죽음 앞으로, 작은 상처에도 자주 흔들리는 나를 데려간다. 수장된 꿈과 정면대적하라고. [양순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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