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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청비](136) 사는 게 뭐라고
[자청비](136) 사는 게 뭐라고
  • 이경아
  • news@newslinejeju.com
  • 승인 2024.03.14 09:33
  •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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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아 수필가
이경아 수필가
▲ 이경아 수필가 ⓒ뉴스라인제주

빨간 동백꽃 송이가 툭툭 떨어지는 순간이 처연하다. 한 송이 주워 코에 갖다 대며 숨을 들이쉰다. 향기가 없는 꽃, 벌과 나비가 없는 겨울에 피는 꽃의 숙명처럼 도드라진 색으로 동박새를 부른다. 작은 날개로 푸드덕거리며 이 꽃 저 꽃으로 바삐 오가는 동박새가 제 할 일로 분주하다. 겨울 한가운데서 빠져나온 생물들이 꿈틀댄다.

시간이 흐르는지 내가 흐르는지 쉼 없이 낮과 밤이 무시로 바뀐다. 계절과 계절 사이의 바람이 바뀌고 하늘빛이 조금씩 변한다. 누군가에게는 절실한 시간 일 수도 있는 지금, 잉여분의 시간처럼 죄책감에 빠져든다.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뭐!" 기대감 없이 사는 동조의 말에 팽팽한 신경줄이 느슨해진다. 이게 아닌데.. 이렇게 사는 게 맞나? 소득이 없고 결과물이 없는 많은 생각들이 무위와 허탈에 빠진다. 고여 있는 물처럼 냄새가 난다. 분철된 시간들이 과거로, 현재로 끊어지듯 이어져 온다.

어쩌다 시작된 이웃 삼춘의 옛날 얘기 속에 빠져든다. 해가 뜨면 그날의 노동이 시작된다. 햇볕에 그을린 얼굴, 까맣고 깊은 주름은 나이를 종잡을 수 없게 한다. 무표정한 눈빛이 흔들린다. B삼춘에게도 젊은 날이 있었겠지... 젊은 모습을 상상해 본다. 한순간의 시간도 거저 흐르지 않고 육체를 비틀어서도 그날의 노동치는 목구멍의 밥이었다. B의 친정어머니는 과부가 된 딸에게 어린 손녀를 키워 주마하고 먼 마을 재취자리로 보냈다. 불안한 눈빛으로 울음을 참고 있는 어린 딸이 눈에 밟혔다. 개가하는 엄마를 잡지 못하고 외할머니 뒤에서 떠나는 엄마를 바라보는, 어린 딸의 눈을 애써 외면하고 돌아섰다. 딸은 어른들의 윽박지름에 그래야만 하는 줄 알고, 어린 나이에 어쩔 수 없는 체념이 목울대를 누른다. 어린 딸을 버리고 함덕에서 이곳으로 왔다. 재혼을 한 B삼춘의 젊은 날 이야기이다. 삼춘의 지난한 세월이 영화 속 한 장면처럼 그려진다. 사십여 년 묻어둔 얘기를 아무 연고도 없는 나에게 무심히 꺼낸다. 눈물을 훔치며 두고 온 어린 딸을 버렸노라 한다. 그 소녀의 외로움을 어루만져본다.

아픔도 시간과 더불어 삭혀지고 B삼춘을 닮은 중년의 딸이 서 있다. "어머! 따님이세요!" 나의 인사에 두 여자의 눈빛이 흔들린다. 뭐라 하는지 못 알아 듣는 제주 사투리로 중얼거린다. 외면하는 그때를 이제 서야 고개가 끄덕여진다. 때 되면 가끔 얼굴 보며 산다고 한다. 삼춘은 억척스레 땅을 일구며 열심히 살았다 한다. 전처의 소생들은 곁을 안주고 속은 뭉그러져 바스락 거린다. 나이 많은 남편 병수발과 쉼 없는 노동으로 감정이 메말라 갔다. 버리고 온 딸은 점점 아픈 기억쯤으로 잊혀져 갔다. 수 십 년이 흐를 동안 삼춘의 인생 역경은 뼈마디 마다 옹이가 베고 틀어진 채로 이곳에 뿌리를 내렸다. "이제 다 늙었쪄! 내 마음 아무도 몰러". 이제는 동네 눈치도 볼 필요 없다고, 감정의 골도 삭혀져 열 살의 딸이 늙은 엄마를 보러 온다.

얼마 전 인기리에 방영된 티비 드라마가 생각났다. 제주 사람 중에 그런 얘기는 동네마다 한두 집 꼭 있는 사연이란다. 나와는 너무도 다른 인생을 살아온 삼춘의 시간을 생각해 본다. 제주에서 혼자된 여자의 일생은 잉여분의 목숨처럼 누가 거둬 줘야만 사는 시절이 있었다. 그 많은 사람들의 얼굴처럼 다양한 삶들이 있다. 남의 인생사가 한낱 얘기 거리로 치부되기에는 가슴 한편의 먹먹함으로 아릿하다.

미래를 꿈꾸는가? 달력을 넘기며 삼월이 주는 설레임이 과거의 추억으로만 미적지근하다. 조카의 대학 입학 소식처럼 시간은 희망이기도 하고, 또 첫 월급 탄 조카의 시간은 미래지향적이다. 나의 시간들은 뭉턱뭉턱 짤려 나가는 식빵조각이다. 생의 지나온 시간들이 나를 말해준다. 새봄을 맞이하며 빠르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의미를 찾아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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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불아래그림자 2024-03-15 15:37:49
"나의 시간들은 뭉턱뭉턱 짤려 나가는 식빵조각"
시같은 문장에 가슴울림 느껴봅니다
나이를 먹어감에
짤려가고 남은 조각들이 점점 작이짐을 알아갈수록
주변의 젊은생명들은 木靑색 짙어짐을 봅니다

길동이 2024-03-14 19:59:57
어떻게 살아야 행복하고 보람차게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
우리는 삶을 살아가는 동안 자신에게 끊임없이 질문하고
고민하게 되는 것 같네요

구엄댁 2024-03-14 13:53:44
누구나 그 인생은 한편의 소설이라더니 마음 찡한 스토리가 낙화와 겹쳐지네요

정원사 2024-03-14 13:31:19
사는게 뭔지 다시 한 번 일깨우는 글...
감사합니다

새 빛 2024-03-14 10:57:48
어촌 마을에선 바다에
남편을 떠나보낸 여인들의 사연들이 많았었다죠 .
그래서 남은자들의 삶에 퍽퍽함이 드러난 글 속에 " 사는게 뭔지 " 애잖한 마음 동감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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