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9 11:17 (월)
김영중 전 서장 “대한민국 전복하려고 한 4·3 주동자, 민중항쟁이라 할 수 없어”
김영중 전 서장 “대한민국 전복하려고 한 4·3 주동자, 민중항쟁이라 할 수 없어”
  • 양대영 기자
  • news@newslinejeju.com
  • 승인 2023.10.10 16: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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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김영중과 제주4.3](5) 제주4.3의 성격은 무엇입니까?
“김달삼이 월북한 이후, 이덕구는 대한민국 상대로 선전 포고”
“김달삼·이덕구, 북한 국기훈장 받고,평양 신미리 애국열사 묘역에 가묘”
​​​​​​​“남로당의 행위, 대한민국 반대했기에 이것은 민중항쟁 아니고 폭동이고 반란이다”

제주의 중심 인터넷신문 <뉴스라인제주>와 <데일리제주>는 한국 근현대사의 제주4.3사건을 재조명 하므로써 도민의 알 권리를 충족하고 더 나아가 4·3해결에 기여해야 하는 제주지역 언론의 사명을 다하고자 이 기획물을 취재, 보도합니다. 취재에 응해주신 김영중 서장님께 감사드립니다. 도민 여러분의 많은 응원과 함께 열독이 있기를 기대합니다. [편집자註)

# 제주4.3 증언에 들어가며

1941년생인 필자가 7세 때 발발한 제주4·3사건은 제가 16세가 되어서야 완전히 종료되었다. 만 9년간 제주도에는 피바람이 불었다. 중산간 마을에 살던 우리는 사건이 일어난 직후 해안 마을인 애월리로 소개(疏)하여 겨울을 나고 봄이 되자 옛 삶의 터전과 가까운 곳, '사장' (射場)이라는 마을 공동소유지로 올라 와 '함바'라는 초막을 짓고 마을 전 주민이 집단으로 거주했다.

우리는 낮에는 주택재건 사업에 몰두하고, 밤에는 보초를 섰다. 허물었던 주택이 재건되자 복귀하여, 마을 주위에 성을 쌓고 공비들의 습격을 방어하기 위해 보초를 서면서 어려운 생활을 이어나갔다. 이제 제 나이 80을 넘기면서 기억력도 전과 같지 않고, 4·3에 대한 저의 주장을 펴는 일은 후진들에게 맡기고 일단 접으려고 마음을 정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더 있다.

첫째, 그간 여러 가지 방법으로 4·3에 대한 저희의 정당하고 진실한 주장을 펴보려고 노력했지만 좌파들이 화해와 상생이라는 구호 아래 파묻으면서 생각이 다름을 인정하지 않아서 이다. 법과 제도로 우리의 의견을 개진할 공간을 차단하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 하면서 냉소와 갈등을 부추기는 교육과 홍보 활동을 서슴지 않는 등 거대하고 완고한 벽에 부딪혀서 이다.

둘째, 국가가 역사해석을 독점하려는 경향이 노골화되고 있어서 제가 할 영역이 사라져서 이다. 역사 문제는 원칙적으로 학문적 영역입니다. 학자 간에 연구와 토론으로 합의를 하거나 주장하게 하는 것입니다. 관련된 자료 접근권도 공평하게 부여하고, 부담 없이 토론에 참여할 기회와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합니다.

정치 권력과 특정 집단이 이를 전유물처럼 독 점하려는 것은 역사 바로 세우기에 어깃장을 놓는 일입니다. 우리에게는 4·3 논의의 장에 참여할 기회도 없고, 역사적 자료에 대한 접근성도 차단되었으며, 심지어 현실은 역사해석의 자유마저 형벌 만능주의로 옥죄려는 위력 앞에 처해 있습니다.

셋째, 저의 주장이나 자신에 대한 발언 기회가 없어서입니다. 4·3과 관련한 저의 책이나 강의에 대한 좌파의 평가는 극지 기온보다 더 찹니다. 수구, 꼴통, 극우, 보수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 모양입니다. 그것 또한 그들의 자유이니 전혀 개의치 않지만 어쩔 도리도 없습니다. 저는 역대 4·3희생자유족회장과 대화할 때마다 분명히 밝혔듯이, 4·3 당시 제 가족 중 군경이나 아니면 남로당으로 활동한 분이 없습니다.

그들로부터 인명피해를 당하거나 가해한 사실이 없어서 누구에게 원한을 품거나 미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저는 무직이기에 유족들과 경쟁업체를 경영하여 손해를 보거나 끼친 일도 없고, 그들에게 욕을 한 사실도 없습니다. 제가 불법 집회를 하거나 어떠한 폭력이나 폭언을 행사한 사실도 없습니다.

오히려 토론장에 나가 제 의견을 개진하거나 질문을 하다가 봉변을 당한 경우는 몇 번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나를 극우라고 합니다. 이는 아마도 그들의 주장에 동조 순응치 않고, 감추고 싶은 사실들이 밝혀지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데서 오는 반응으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좁은 지역사회에서 그들과 사이가 나빠서 득 될 일도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대한민국 건국史나 4.3史 앞에 확고부동한 신념이 있습니다. 그 것은 오직 진실에 기초할 뿐, 그 어떤 억지나 거짓, 위협, 시류를 초월하고, 그 어떤 손익( 益), 친소(疏), 호오(好惡), 애증(愛僧), 타협(協)을 떠나 오로지 객관적으로, 어느 것이 옳고 그름'의 문제로 접근하고 판단할 따름입니다.

날이 갈수록 4.3史가 일방적 편향적으로 왜곡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이건 아닌데 하는 생 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4·3의 본질에서 가장 핵심적인 진실규명과 근본적 원인 규명 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오직 인명피해만을 다루는가 하면, 그것도 남로당의 만행은 사라 지고 군경에 의한 인권침해만 거론되면서 전방위적인 '민중항쟁론' 또는 '통일투쟁론'에 기울어짐을 체감합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결코 무고한 인명피해를 가볍게 취급하자는 것도 아니고 그들에 대한 보상을 반대하거나 무고한 희생을 기리지 않겠다는 말도 아닙니다. 다만 4·3의 진실이 무엇인가 하는 점은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중략. 김영중의 ‘제주4.3사건 문과 답’에서)

# 제주4.3의 성격은 무엇입니까?

(양대영 기자) 양대영 기자입니다 오늘도 김영중 서장님을 모시고 지난 시간에 이어서 4·3의 성격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안녕하십니까? (오늘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김영중 서장) 네 지난번에 의해서 계속 4·3 성격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김달삼은 8월, 그 1948년 8월 2일날에 제주를 탈출해 가지고 해주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북한으로)올라갔습니다.

빈 몸만 올라간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 지하 선거 투표지를 가지고 (북한으로) 올라갔죠. 그런데 6·25 전해인 1949년에 강동정치학원, 이게 그 게릴라 양성 학원입니다.

거기에 졸업생 300명을 데리고 동해안으로 해서 남한에 침투해서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하려고 게릴라전을 전개하다가 사살이 됐습니다.

이것은 뭐냐하면, 4·3을 주동하고 북한 김일성 정권을 공고히 하고 남한 정부를 전복해서 공산화 통일을 하기 위한 그런 행위였다. 그렇게 보는 겁니다.

다음에, 김달삼이가 월북한 이후에 제2대 인민 해방군 사령관 이덕구는 대한민국을 상대로해서 선전 포고를 했습니다.

말하자면 대한민국을 전복하겠다는거죠. 국민이 절대적 지지와 참여 속에서 수립한 대한민국을 전복하려고 하는 것이 그 4·3 주동자가 한 행위인데 이것을 민중항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폭동이고 반란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김달삼은 국기훈장 2급, 이덕구는 북한에 가지도 않았지만 국기훈장 3급을 받고, 평양 신미리에 있는 애국열사 묘역에 가묘가 있습니다. 이것만 봐도 4·3은 항쟁이 아니다. 폭동이고 반란이다.

다음에 4·3을 주동했던 주동자 김달삼, 안세훈, 강규찬, 고진희, 이정숙, 문등영은 월북해가지고 북한 제1기 최고 인민회의 대의원이 됐습니다. 이것은 우리 한국에서 말하면 초대 국회의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김달삼이는 헌법 위원까지 되고,

왜 대한민국 건국에는 그렇게 결사 반대하고, 방해를 하면서, 북한에 가서 북한 정권 수립에는 이렇게 국회의원이 되면서 적극 앞장을 섰느냐, 이것이 폭동반란이지, 민중항쟁이겠느냐, 이렇게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다음에는 남로당 제주도당은 6·25 직후에 각 읍면별로 인민군 지원 환영회라는 것을 조직했습니다.

그래서 인민군이 목포까지 오고, 지금 대구하고, 부산하고, 제주도만 남았으니까, 같이 인민군과 남하해 가지고 대한민국 적화투쟁에 이 사람들이 왔죠.

그러다가 안세훈도 병사했고, 그때 조몽구는 왔다가 검거돼 가지고 형을 살고, 고향에서 천수를 누리다 돌아갔고,

그다음에 나머지들은 강규찬, 고진희도 6·25때 남침하는 인민군과 같이 내려왔다가 사망했고, 그렇습니다.

이것은 대한민국을 적극적으로 반대한 4·3주동자들이 북한정권에 앞장섰다. 이렇게 보고 인민군 지원환영회를 조직해 가지고 한라산에 있는 공비들과 합세해가지고 엄청나게 습격 활동을 했죠.

제가 조사해 본 바에 의하면 경찰 기록에 나온 겁니다만, 마을 습격 56회, 이것이 6·25때로부터 14개월간 통계입니다.

14개월간에 습격이 56회, 관공서 방화 4개소, 민가 소실 324동, 사망은 군인 10명, 경찰관 29명, 민간인 38명, 부상은 군인 6명, 경찰관 6명, 민간인 23명, 민간인 납치된게 41명, 이와 같이 아주 그 공세를 취했습니다.

그래서 인민군이 목포까지 왔는데 곧 제주도에 상륙할 거니까, 여기서도 더 압력을 가해야 된다 해서 그렇게 했거든요. 인민군지원환영회 섬뜩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서울의 대진연이라고 아주 북한 좋아하는 아이들이 있는데 김정은 환영위원회도 만들고 뭐 백주에 광화문에서 데모도 하고 했습니다만,

전국에서는 아무데도 그런 움직임이 없는데, 제주도 4·3희생자 유족회가 그 좌파 단체, 한 40개 단체이고, 합동으로 김정은 제주방문 환영위원회를 조직해서 기자회견을 한 것을 보고 그 이름이 ‘환영위원회’ 저는 좀 섬뜩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그 김정은 외할아버지가 제주도 북촌, 그래서 외할아버지 땅 제주도를 방문하는 것은 물론 당연한 일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만 제주도를 방문 하는데 환영한다고 한다면 전제 조건이 있어야 돼요.

뭐냐, 6·25 남침을 사과해야 돼요. 아웅산 사건, KAL기 폭파 사건, 울진 삼척지구 무장공비 침투 사건, 이런 것들에 대한, 또 연평도 포격, 천안함 피격, 이런거에 대해서 진정어린 사과를 한 다음에, 그래서 방문하라! 이래야 된다, 말이죠.

그렇지 않고 무조건 방문한다, 이것은 저로써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이제 이런 생각이 듭니다.

다음에 인민군지원환영회도 그렇지만은, 다음번으로 남로당이 여기에서 4·3을 일으키고 했는데 남로당 강령이 12개의 항목으로 돼 있는데 이것을 읽어 보면은, 조선에 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렇게 돼 있고,

여기에 보면 막스레닌 주의에 의해서 '유물사관' 이런 거에 의해 가지고 국가를 건설한다는 그런 내용이 엄연이 있다 말이죠. 그러면 남로당이 한 행위는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에 대해서 적대적이었다.

그래서 남로당의 행위는 반(反)대한민국 목적이 있기 때문에 이것은 민중항쟁이 아니고 폭동이고 반란이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나머지 것은 다음 기회에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김영중 전 제주경찰서장
▲ 김영중 전 제주경찰서장 ⓒ뉴스라인제주

□ 김영중(金英仲)

· 1941년 제주도 제주시 애월읍 납읍리 출생
· 애월상업고등학교(현, 애월고등학교) 졸업
· 해병대 병장 만기 제대(제126기)
· 서귀포경찰서장
· 제주경찰서장
· 도로교통공단제주도지부장
· 광주고등법원 제주부 민사조정위원
· 제10기 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
· 제주특별자치도 치안행정위원회 위원장
· 제주도재향경우회장 등 역임

저서

· 그때 거기서 나는 상·하
· 『창꼼으로 본 세계 상·하 창은 창구멍이라는 제주어)
· 『내가 보는 제주 4·3사건』
『남로당제주도당 지령서 분석』
· 『레베데프 비망록』(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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