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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청비](105) 꿈꾸는 바닷가
[자청비](105) 꿈꾸는 바닷가
  • 이을순
  • news@newslinejeju.com
  • 승인 2023.06.22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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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을순 소설가
이을순 소설가
▲ 이을순 소설가 ⓒ뉴스라인제주

서울에서 딸과 외손자가 제주에 내려오자 남편과 나는 손자를 데리고 도두 바닷가를 찾았다. 썰물인 바닷가엔 두 분의 할머니가 보말과 게를 잡고 있었다. 우리도 근처에서 돌을 이리저리 들추며 보말을 잡기 시작했다. 손자는 아주 신바람이 났다. 마치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 눈을 왕방울만하게 크게 뜨고는 돌멩이에 달라붙은 보말을 떼어냈다. 그러다가 게가 나타나면 흥분에 찬 목소리로 할아버지를 불렀다. “할아버지 여기 게가 있어요! 빨리 잡아주세요?” 할아버지가 잽싸게 게를 잡아주면 손자는 그걸 플라스틱 통 안에 넣으며 이제껏 놀이 중에 가장 재밌다고 말했다. 이런 손자에게 할아버지는 오일장에 데려가서 토끼, 닭, 앵무새, 거북이, 고양이 등 이런저런 장터 풍경도 보여주었다.

그 다음날은 비양도에 갔다. 배를 타본 적이 없는 손자에게 그 경험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예전에는 그냥 익숙한 곳에만 데리고 다녔다. 하지만 지금은 한글도 알고 책 읽기와 글쓰기를 무척 좋아해서 할아버지는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을 손자에게 맘껏 보여주기를 원했다. 어렸을 때 기억이 평생을 가기 때문이다. 아니 지난번 딸이 카톡으로 보내준 손자의 글 때문인지도 모른다. ‘작은 연못’이라는 글을 읽고 나도 깜짝 놀랐으니까.

「옛날에 작디 작은 연못이 있었대. 그 연못에 어린아이들이 자주 오는 곳이래. 거기에는 개구리와 올챙이가 아주 많고, 어린 수생식물이 있었더래. 그 연못은 밤에 더 어린아이들이 자주 왔고, 돌을 ‘풍덩!’ 하고 던지면 개구리들이 “개굴개굴” 울면서 폴짝폴짝 뛰었어. 그 연못을 싫어하는 조직은 단 하나뿐이었어. 바로 ‘죽은 사람’이야. 그래서 죽은 사람이 미라로 변하지 않도록 작은 연못과 비슷한 연못을 무덤으로 사용하는 국가도 있었대. 거기를 무덤으로 사용하는 국가에서는 항상 죽은 사람이 미라로 변했대. 그걸 발견한 국가에서는 아주 오랫동안 연못을 무덤으로 사용하는 걸 금지했대. 그리고 그 강이 1에서 4로 변한 적도 있었는데, 지금은 아주 맑고 유명해. 밤에는 예쁜 별이 반짝이고 달빛이 밝게 빛나는 그 연못의 이름은 바로 ‘작은 연못’이야!」

일곱 살 아이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손자는 아빠가 회사에서 퇴근하면 노트북을 잠깐 빌려 이렇게 글을 조금씩 써서 모아둔다고 한다. 아주 느린 속도로 자판을 쳤을 손자를 떠올리니 기특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래의 작가를 보는 듯했고 손자의 관찰력과 상상력이 너무나 뛰어났다. 그래서 남편과 나는 손자에게 더 많은 체험을 해주고 싶어진 것이다.

비양도에 들어간 우리는 손자에게 해녀가 물질하는 모습도 보여 줄 수 있었다. 그 섬에서 점심을 먹고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주변을 둘러보다가 다시 배를 타고 한림으로 나왔다. 남편은 손자를 놀게 해주려고 협재 해수욕장과 금능해수욕장으로 향했으나 그 어디에도 주차할 공간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금능포구로 갔다. 백사장이 있는 둥근 원담 안에는 아이들과 그 부모들이 물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원담 안에 바닷물이 거의 빠져나가 아이들이 놀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아이들은 첨벙첨벙 물 위를 걸어다니면서 뭔가를 열심히 줍고 있었다. 멜이었다. 바닷물이 가득 들어왔다가 쏴 빠져나가자 원담에 갇혀 있던 멜 떼가 미처 빠져나가지 못해 죽거나 거의 죽어가고 있는 멜이 아주 많았다. 금세 아이들과 친해진 손자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멜을 빈 플라스틱 음료수 용기에 주워 담았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손자는 창고 옆에 있는 길냥이 밥그릇에 자신이 잡은 멜을 모두 쏟아부었다. 잠시 후 고양이들이 나타나자 손자는 부엌 식탁 의자 위에 올라가 창문을 통해 멜을 맛있게 먹는 고양이들을 바라보며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크게 말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 저 멜 제가 직접 잡은 거예요. 고양이들이 아주 맛있게 잘 먹네요!”

서울로 떠나기 전날 밤 손자는 자신이 그린 그림을 내게 주었다. 제목이 ‘꿈꾸는 바닷가’다. 바다 중간쯤 커다란 붉은 햇덩이가 떠오르고 있고, 새벽의 바닷가에는 갈매기 두 마리가 구름 사이로 훨훨 날아가고 있다. 그 앞 양옆으로 우뚝 서 있는 빨간 등대와 검은 돌 하나. 저 그림 속에 손자의 꿈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그것을 안방 벽에 잘 붙여 놓았다.

공항으로 떠나기 전 손자는 돌멩이를 집어 연못에 던졌다. 할아버지는 돌을 많이 던지면 연못이 메워지니 제주에 올 때마다 세 개씩만 던지라고 했었다. 하지만 손자는 자꾸만 돌을 던지고 있었다. 문득 손자의 글에 나오는 연못이 우리 집 정원에 있는 연못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스쳤다. 딸과 손자가 서울로 돌아간 뒤 우체통에는 손자가 남긴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쓴 편지가 들어 있었다. 헤어질 시간이라서 아쉽다는 글과 그동안 많은 추억을 머릿속에 담아주셔서 정말 감사하다는 편지였다. 가슴이 뭉클해졌다.

지금 나는 손자가 남긴 ‘꿈꾸는 바닷가’ 그림을 바라보고 있다. 아마도 저 그림 속 햇덩이가 중천에 둥둥 떠 있을 무렵이면 훌쩍 자란 손자의 꿈도 이 세상에 훤히 드러나 있으리라. 이런 외손자 덕분에 남편과 나의 노년 인생이 어쩌면 더 감사하고 행복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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