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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청비](104) 네 가지 사랑
[자청비](104) 네 가지 사랑
  • 김순신
  • news@newslinejeju.com
  • 승인 2023.06.15 09: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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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신 동백문학회장
김순신 동백문학 회장
▲ 김순신 동백문학 회장 ⓒ뉴스라인제주

행복한 인생, 행복한 삶을 살고 싶어 하나? 모든 사람이 다 행복하게 사는 것은 아니다. 지금, 이 순간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감사하는 이가 있지만, 퉁퉁 부은 마음으로 분노와 불안, 미움, 원망 등을 잔뜩 품고 있는 이도 있다.

최근에 나의 마음에 파문이 인 일이 있었다. 처음에는 오해가 있었나 해서 대화를 시도했는데, 대화를 거부하며 비난하는 문자까지 왔다. 욱하는 감정과 함께 상대에 대한 미운 감정이 죽순처럼 커졌다. 온갖 생각으로 소용돌이치는 감정 때문에 불면의 밤이 이어졌다.

내 마음의 평화가 상대방 때문에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상황에 이르렀다. 내가 원하는 상황이 아닌 곳으로 자꾸 가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내 감정의 주인은 나인데, 나는 그 감정에 의해 계속 휘둘리고 있었다.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행복하고 싶은 사람이고 행복을 선택할 권리가 있음에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우리가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사람마다 다 이유가 있겠지만, 공통적인 이유는 내 안에 사랑이 없기 때문이라고 어느 강사가 한 말이 떠올랐다. 과연 사랑이란 무엇인가?

C.S.루이스는 「네 가지 사랑」이라는 책에서는 사랑을 네 가지로 설명하고 있었다. 책의 첫머리에서 선물의 사랑(gift-love)과 필요의 사랑(need-love)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가장이 가족을 위해 일하고 노력하는 것은 선물의 사랑이고, 아이가 엄마 품속을 파고드는 모습은 필요의 사랑이라고 했다. 하느님의 사랑은 선물의 사랑이며, 하느님을 향한 인간의 사랑은 필요의 사랑이라고 했다. 인간은 주는 사랑과 필요에 의한 사랑 그 어느 것 하나만을 선택할 수 없는 존재다. 그 두 가지의 사랑이 다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주는 사람이 있는 반면 아기처럼 사랑을 필요로 하는 존재가 있게 마련이다.

흔히 사랑을 네 가지로 말할 때는 에로스(육체의) 사랑, 필리아(우정적) 사랑, 프라토닉(정신적) 사랑, 아가페(희생적) 사랑을 이야기한다. 이 책의 작가 c.s 루이스는 애정, 우정, 에로스, 자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애정은 사랑 중에서도 가장 순수하고 가장 널리 퍼져 있는 사랑이다. 애정은 우리의 삶에 구석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일상적인 온갖 개인적인 것들과 더불어 살아간다. 부드러운 실내화, 낡은 옷가지, 오래된 농담, 라디오의 음악 소리, 재봉틀 소리, 잔디밭에 뒹굴고 있는 인형 따위 등이다. 애정은 필요의 사랑이기도 하고 선물의 사랑이기도 하다.

존던 (john donne)이 ‘애정이 우리를 죽이지 않게 하시고, 또 애정이 죽지도 않게 하소서’라는 말을 한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우정은 가장 덜 태생적이라 말하고 있다. 가장 덜 본능적, 가장 덜 필수적, 가장 덜 생물학적이고 가장 덜 군집 본능적이다. 생물학적으로 생각하면 인류는 우정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우정은 본능으로부터 자유롭고, 의무로부터도 자유롭고, 질투로부터도 자유로운 사랑이다. 이 사랑은 그야말로 탁월하게 영적인 사랑이다. 친구와의 관계는 이렇게 자유로운 관계이어야 함을 생각하게 했다.

에로스는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에로스의 그 숭고성 뒤에는 위험의 씨앗이 숨어있다. 에로스는 마치 신처럼 말한다. 완전히 헌신하고, 행복을 깡그리 무시하고, 이기심을 초월하는 것이 마치 영원한 세계에서 오는 메시지처럼 들린다. 그러나 에로스의 그러한 숭고성과 자기 초월성은 선(善)뿐 아니라 악(惡)을 향해서도 돌진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고 꼬집고 있다. 에로스에 내재한 육적이고 동물적인 성적 요소를 비너스라고 부르고 있다, 에로스 없는 성적 욕망은 그것 자체를 원하지만, 에로스는 그 연인 자신을 원한다. 에로스는 그 안의 비너스가 최소한으로 축소될 때 ‘가장 고상하고’, ‘가장 순수하다’라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육체 속에서 어떤 절대적인 것을 발견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육체적 사랑은 숭고하기도 하지만, 타락으로 이끌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랑에 빠지기를 원하지만, 금방 소멸한다. 에로스는 모든 사랑 중에서 가장 단명하기로 악명높은 사랑이다.

인간이 자기 몸을 보는 세 가지 관점이 있다. 첫째는 몸을 영혼의 감옥 ‘무덤’‘똥 부대’라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의 관점이다. 둘째는 몸은 영광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신 이교도적 관점, 누드주의자들, 그리고 암흑의 신들을 신봉하는 자들의 관점이다. 셋째는 자기 몸을 ‘나귀 형제’라고 부른 성 프란치스코의 표현에 나타나는 견해인데, 이 책의 작가는 세 번째 견해가 바르다고 보고 있다. 나귀는 쓸모 있고 억새고, 사랑스럽고 때로는 채찍, 먹이를 주어야 하는 동물이다. 나귀는 숭배대상도 아니고 악한 존재도 아니다. 아름답기도 하고 우스꽝스럽기도 한 동물일 뿐이다.

자비는 하느님의 사랑이다. 루이스는 인간의 본성을 정원으로 비유해서 설명하고 있다. 정원을 누군가가 가꿀 때 생명으로 충만하다. 온갖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다. 하느님의 은총이 비와 햇볕같이 내리쬐면 정원은 아름다워진다. 인간은 하느님 없이 살 수 없듯이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 하느님의 사랑은 선물의 사랑이고 자비의 사랑이다.

결혼 직후 불치병에 걸린 남편, 아무런 쓸모가 없는 상태에서도 아내는 극진히 간호한다. 이게 바로 자비의 사랑이다. 사랑스러워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자체이기 때문이다.

네 가지의 사랑에 대하여 등위를 매길 수는 없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사랑이 자비임을 알았다. 결국, 우리의 사랑은 자비로 이어지고 자비로 막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의지라는 말을 한다. 감정은 하나의 사실일 뿐이다. 이런 감정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지는 본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감정 때문에 그를 미워하는 것은 사랑이 아닌 걸 안다. 그러나 감정의 동물이라 감정 때문에 사랑에 금이 가는 어리석은 일이 일어나곤 한다.

사랑은 의지요 연습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냥 그를 사랑한다 생각하고 행동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사랑하게 되고 싫다고 해서 상처를 주면 점점 더 싫어진다는 것이다.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이 상대방에게 욕을 하고 한 사람을 그 욕을 듣는다. 처음에 그 욕을 듣는 사람은 화가 나고 자기를 방어하려고 한다. 그러나 여러 번 연습할수록 욕을 듣는 사람이 마음을 활짝 열고 ‘그래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고 말하면, 욕의 효과는 바람처럼 사라진다고 했다. 의지를 가지고 연습하면 미움도 원망도 사랑으로 바꿀 수 있다는 뜻이다.

일단 분노의 마음을 멈추고 상대방의 상처, 고통, 불안을 먼저 생각했다. 그 사람이 어떤 상처와 고통, 트라우마가 있어서 나에게 그렇게 하는 것으로 생각하니, 오히려 그 사람이 불쌍하게 생각되었다. 그 사람을 연민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내 안에 작은 사랑이 꼬물락거리며 자라고 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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