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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상금의 시방목지](76) 제비집
[문상금의 시방목지](76) 제비집
  • 문상금
  • news@newslinejeju.com
  • 승인 2022.06.16 13: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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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끼 제비들의 입은 꼭 바닷가 손바닥 가시선인장의 꽃처럼 노랗다, 호박꽃처럼 노랗다, 짹 짹 짹 짹, 노란 꽃 서너 송이 활짝 피어난 제비집’

 

제비집

 

문상금

 

하필이면
방 한 칸 부엌 한 칸
궁색한
살림집 처마 밑에
둥지를 트느냐

제비의 본능과 부지런에
열리는 새벽

아, 잉태란
참으로 눈물 나도록
눈부신 일인가 보다

나는 아침마다
제비집 밑에
깨끗한 신문지를 깐다

짹 짹 짹
고 깜찍한 새끼 제비의 탄생을
목마르게 기대한다
 

-제2시집 「다들 집으로 간다」에 수록
 

문상금 시인
▲ 문상금 시인 ⓒ뉴스라인제주

이 얼마만이던가, 우르르 삼계탕 먹으러 간 토계촌 처마 어디에선가, 짹 짹 짹짹, 순간 알았다, 둥글고 튼실한 제비집이 있구나, 그 제비집 안에는 갓 부화한 새끼들이 있다는 것을.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짹짹 부산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높은 처마 속 흰 전등 위에 제비집 하나 그리고 처마 모서리에도 제비집이 하나, 모두 두 군데 집의 제비 식구들이 잡아온 벌레들을 꿀꺽 삼키며 맛있게 저녁밥을 먹는지, 사뭇 소란스러웠다. 그 밑에 놓인 종이 상자 안에는 진흙 부스러기와 풀잎 들이 떨어져 뒹굴고 있었다.

나도 갑자기 배가 고파져서 김이 솟아오르는 삼계탕을 얼른 작은 접시에 덜어놓고 배추김치를 척 얹고는 후후거리며 깨끗이 먹었다.

제비는 사람으로 치면 나그네다. 이동하는 새다. 장거리를 날아서 이동한다는 것은 엄청 고난이도의 비행이다. 낯선 곳, 참으로 눈물 나도록 눈부신 잉태를 위하여 부화를 위하여, 마치 고행을 하듯이 집짓기에 몰입하는 모습을 많이 봐왔다. 지푸라기와 진흙을 이용하여 마치 달 항아리를 빚듯이 정성을 다하여 집을 지었다. 아니, 나그네가 그것도 잠시 부화하고 새끼들을 키울 동안 머물 집인데도 그처럼 제비들은 모성애 부성애가 강하였던 것이다.

옆집 할아버지는 지푸라기며 진흙이며 제비 배설물들이 귀찮고 아침저녁 부산함도 싫어서인지 대나무 장대로 제비집을 탁탁 두드려 부셔버리곤 하였다.

아뿔싸, 이를 어째, 어린 나는 발만 동동 구르곤 하였는데, 며칠 후에 또다시 제비들이 짹짹거려서 내다보았더니, 헐린 집 옆으로 또다시 제비집이 꾸려지고 있었다. 생명이란 이처럼 끈질긴 것이다.

오래된 초가집 제비집을 향하여 일자로 기어오르던 구렁이를 본 적도 있었다. 스르르 벽을 타고 올라가더니만, 작은 제비 알이나 새끼를 먹잇감으로 삼는 것이었다.

서귀포에서 그래도 가장 번화한 동명백화점 앞 전선줄에 제비 떼가 줄지어 앉아있었던 적도 있었다, 불빛이 그리워 모여들었나, 전선줄 아래 인도엔 온통 제비의 흰 분비물로 인하여 엉망이었다. 한동안 그렇게 몰려 있다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길을 떠나는 영락없는 나그네였다.

사람이나 새나 역마살이 있다는 것은, 어쩌면 더 넓고 좋은 세상을 많이 보고 느끼고 경험하라고 하는 것일 것이다.

오늘은 하논에 가서 명이 나물을 꼭 닮은 양애 넓은 잎을 따와서 장아찌를 담갔다. 살짝 독특한 향이 배어있다. 향은 없는 것 보다는 있는 것이 더 낫다. 역마살도 없는 것 보다는 있는 것이 더 낫다. 나그네처럼 길을 떠나보는 것이 안 떠나는 것보다 더 나은 일이다.

제비들이 다 떠나고 빈 집, 사람들이 다 떠나고 빈 집, 떠나는 것이 어디 한 둘이겠는가.

어찌 알았을까 온기 없는 것을, 속은 허(虛)하고 뼈대만 앙상해지고 있다는 것을, 수어(手語)처럼 적막(寂寞)으로 채워지고 있다는 것을, 목숨보다 더 질긴 끈끈한 흰 줄로 제비집을 칭칭 감고 있는 거미야.

생(生)에 단 한 번, 빈 먹잇감을 잡았구나. [글 문상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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