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색은 생명이며 죽음이다, 슬프다, 처량하다, 애틋하다, 순수이며 평화이고 또 항복이다, 흰 그림자 아른대는 날이면 종일, 와락, 겁이 나곤 한다 ’
삘기꽃 .1
문상금
바람에 흔들린다
이미 잘 알고 있다는 듯
작은 솜털 같은 그것들은
마구 손을 흔들어댄다
눈물이 나곤 한다
언제부턴가 늘 사람 속에서
외로울 때면
들풀이거나 꽃들이거나 얘기하는 버릇이 있음을
숨길 수가 없다
오늘도 오래도록
풀밭을 거닐었다
그리고 긴 그림자를 끌며 바다에 가 보았다
가슴에 묻은 그리운 이름들을 하나씩 불러내어
그 이름들을 다시 바다 속에 띄워 보냈다
-제3시집 「누군가의 따뜻한 손이 있기 때문이다」에 수록
흰 물결 파도치듯 출렁이는 풀밭을 거닐었다, 삘기 꽃이 바람에 흔들린다. 작은 솜털 같은 그것들은 조그만 바람에도 가녀린 몸짓으로 살랑이며 ‘안녕, 안녕’ 손을 흔들어댄다. 때로 큰 물결 작은 물결로 스러졌다 다시 일어서곤 한다.
한 주먹 뽑아다 꽃병에 꽂아두었더니, 사람들이 들락날락 오고가며 탄성을 지른다. 필시 향수(鄕愁) 때문이리라. 그것은 어린 시절, 삘기가 한창 돋아날 때 한 주먹 뽑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배고플 때마다 한 겹 한 겹 벗겨 그 하얀 속살을 먹어대었던 그 무맛 같았던 추억 때문이리라.
‘흰 그림자’는 검은 그림자라는 말보다 더 세밀히 다가올 뿐 아니라 더 무섭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것은 섬뜩한 묘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삘기 꽃은 무리지어 피어날 때 더 눈에 띤다, 무리지어 흔들릴 때 더 눈부시다. 마치 ‘슬픈 족속’같이.
느닷없이 벚꽃이 피고 벚꽃 눈이 내리고 며칠이 지나자 거짓말처럼 벚꽃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길가의 왕벚나무들은 줄지어 초록 잎들로 무성해졌다.
그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허전함이 몰려들었다 잠시 집에 틀어박혀 있었는데 어느 날 우연히 산책길에서 어떤 새로운 것들이 간질간질 돋아나는 것이었다. 풀밭에 고개를 숙이고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 바라보노라니, 그것은 바로 어린 시절 삘기였던 것이다.
‘그래, 바로 삘기구나!’ 인지하였을 때, 그 넓은 풀밭에 있었던 수많은 삘기들은 곧 내 영혼의 풀밭으로 날아와 나만의 삘기 꽃이 되었던 것이다. 마치 나를 업고 놀아주었던 큰 언니처럼, 흰 옥양목 앞치마를 하고 부엌일을 하시던 어머니처럼.
때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헤매며 침상에 누워 있던 너의 그 흰 손처럼. 너의 흰 손은 무서워 와락 도망치는 나를 따라와 내 이마에 착 달라붙었다, ‘내 이마가 그리 넓고 편안하더냐?’
며칠 도통 시를 쓸 수가 없었다, 먹고 자고 먹고 자고 하였다. 이마가 왜 이리 무거운지, 왜 이리 졸리는 것인지.
삘기 풀밭은 넓은 바다와도 같다, 흰 물결 푸른 물결 파르르 몰려오는 추억의 바다, 그리움의 바다와 같다. 울음의 바다와도 같다.
결국 삘기 밭을 치달리며 그 흰 손가락들을 하나하나 떼어내었다, 그 그리운 이름을 불러주며 천천히 바다 물결 속으로 띄워 보냈다.
갈기갈기 찢긴 피투성이 흰 손가락들은 풀밭으로 날아가 악착같이 삘기 꽃으로 피어났다.
‘오래 기억할게...’ ‘내 슬픈 족속(族屬)아’
하루 종일 풀밭을 거닐었다.[글 문상금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