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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상금의 시방목지](68) 하논.2
[문상금의 시방목지](68) 하논.2
  • 문상금
  • news@newslinejeju.com
  • 승인 2022.04.18 16: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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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편지, 한 장 없는 날, 하얗게 귤꽃이 핀다, 하얗게 귤꽃이 진다’
 

하논. 2
 

문상금
 

곱고
붉은 흙을 밟으며
누군가 감귤 꽃을 솎고 있다

흰 꽃에 홀려
그 흰 꽃의 흐드러진
향기(香氣)에 홀려

벌떼들이
윙윙 엉켜 있다

아, 아찔한
환한 대낮
 

-제5시집 「첫사랑」에 수록
 

문상금 시인
▲ 문상금 시인 ⓒ뉴스라인제주

‘새콤달콤한 거 좋아하시죠? 하논에 가서 세미놀 따가세요, 시간 나실 때마다 따가세요’ 그렇게 작은 언덕에 있는 늙은 감귤나무는 벌써 수 년 째 내게로 왔다.

밭주인은 아니어도 그 세미놀 감귤나무의 주인은 바로 나였던 것이다, 밤낮 수시로 들락거리며 3월 말부터 5월까지 그 새콤달콤한 과즙과 감귤씨를 질근질근 씹으면서 징그러운 늦봄 또한 질근질근 씹어 먹곤 하였다.

한때 너도나도 열풍이 불어서 과수원마다 가득 심었었지만 수많은 개량 감귤품종으로 이제는 뒷전으로 물러난, 황금열매 세미놀,

그 하논밭에도 다 베어지고 밑동만 흉터처럼 남은 언덕배기에 늙은 감귤나무가 딱 한 그루 남아있었던 것이다. ‘안녕’ 하고 찾아갈 때마다 작은 언덕에 우뚝 서서, 거인처럼 양팔 벌려 주렁주렁 자식들을 거느린 채로 쩌렁쩌렁 호탕하게 웃으며 맞이해주곤 하였다. 나뭇가지 속에 숨어있는 귤과 꼭대기에 있는 귤까지 다 따서 먹으려면 꼬박 석 달이 걸렸으며 때로는 나무를 타고 올라야 했다.

마치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다 내어주는, 그 나뭇가지를 타고 오르며 나는 잠시 세상을 잊고 숨어있을 수가 있었다.

새순이 돋고 어느새 귤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또 귤꽃이 지고 새끼귤들이 엄지손톱만큼씩 탱탱 커져갈 무렵에야 비로소 세미놀의 수확은 다 끝났다. 그렇게 늙은 감귤나무와 귤꽃에 대한 시는 십여 편 정도가 씌어졌다.

하논은 분화구다, 아직도 뜨겁다, 붉은 흙이다, 귤 맛도 최고이다, 새벽마다 하논을 다녀오는 날이면 몸이 날아갈 것처럼 가벼워진다.

봄 편지처럼 귤꽃 흐드러지게 피는 날이면 어디선가 벌떼들이 잔뜩 날아와 윙윙거렸다. 범벅처럼 엉켜있는 벌떼들을 바라보며 아, 아찔한 환한 대낮, 너희들도 사랑을 하는구나, 흰 꽃에 홀려, 흰 꽃의 흐드러진 향기(香氣)에 홀려, 사랑을 하는구나, 나는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그 옆에서 시를 쓰곤 하였다.

‘새순도 만져보세요, 귤꽃향기도 맡아 보세요, 귤도 따보세요, 곁가지도 잘라보세요, 시낭송도 해보세요, 영상도 찍어보세요’

어쩌면 정말 시인은 밭주인인 농부일 것이다, 시인으로 하여금 새벽이나 석양이 질 무렵에 광활한 하논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농부는 전생에 시인이었을 것이다, 하논의 올망졸망한 길들을 걸으며 들꽃들을 노래하고 귤 향기를 음미하며 톡톡 귤도 따보게 하고 저절로 시를 쓸 수밖에 없는 환경을 경험하게 해주는 농부는 어찌할 수 없는 시인일 것이다.

여섯 번째 시집 출간 준비를 하고 있다, 아마 일곱 번째 시집이 나올 무렵에는 ‘하논’ 시편들이 쏟아질 것 같다.

하논의 그 붉고 향기로운 흙 같은, 활활 타오르는 불씨를, 나에게 시(詩)의 영감을, 물어다 주는 늙은 농부에게 감사를 드린다. [글 문상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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