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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상금의 시방목지](63)무꽃 필 때
[문상금의 시방목지](63)무꽃 필 때
  • 문상금
  • news@newslinejeju.com
  • 승인 2022.03.14 20: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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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꽃은 하얗다, 분홍이다, 연자줏빛이다, 가장 평범하면서도 가끔은 싸하고 아린 맛의 첫사랑이다’
 

무꽃 필 때
 

문 상 금
 

검은 돌담 너머
무더기로 피어나는
환하고 부드러운 것들

누군가가 그립고
또 그립다면
창문(窓門) 열고 나가
저 무꽃 보아라

차고 단단한
잔별들이 뜰 때까지
또 그립다면
저 온통 무밭에
그대 환한 치아(齒牙)같은
무꽃 보아라

차고 오르는
설레임을 한 번이라도
견디어본 사람이라면
저기 저 무밭에
가만히 숨죽여
저절로 깊어가는
무꽃들을 보아라

때로
미칠 때도 있는 게지

순수(純粹)의
무밭에

두둥
무꽃 핀다

무꽃이 핀다
 

-제5시집 「첫사랑」에 수록
 

문상금 시인
▲ 문상금 시인 ⓒ뉴스라인제주

겨울과 봄, 이 두 계절은 아침 산책으로 대부분 삼나무와 소나무가 있는 언덕 아래 무밭과 배추밭에 가 있곤 하였다, 감귤 수확을 다 끝낸 과수원 구석지엔 드문드문 하귤이나 세미놀이나 노지 한라봉들이 아직도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간밤 드센 서리 탓인지, 무 잎들은 축 처져 무들을 잘 덮어주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붉은 흙 위로 쑥쑥 자라나오는 겨울무들, 추위와 매서운 겨울바람을 덮어준 잎의 영혼이 들어가 앉았는가, 무 윗부분은 연두색으로 물들어 탐스럽게 솟아나와 있었다.

귀가할 때는 붉은 흙속의 무 몇 뿌리 그대로 들고 와, 씻고 썰어서 마치 사과 먹듯이 간식이나 후식으로 먹곤 하였다, 입 안 가득 고이는 그 무즙의 맛, 달고 시원하고 약간 쌉쌀한, 최고의 보약이었다. 그 탓일까, 오랜 시간을 감기 한 번, 기침 한 번 해본 적이 없다.

따뜻하고 축축한 봄으로 시간이 흐를 때, 그 축 처져있던 무 잎 사이로 이른 새벽에 아아, 작은 발기(發氣)가 시작되고 있었다, 죽은 듯 엎드려 있던 그 갈색의 메마른 잎 사이로 꼬물고물, 쑥쑥, 아아, 연초록의 꽃대가 솟더니 금방 꽃망울들이 달리고 희고 연자줏빛의 꽃들이 쉴 새 없이 피어나기 시작하였다.

잠과 잠 사이로

둥둥,
둥둥

어둠과 밝음
순수(純粹)의
무밭에

둥둥,
무꽃 핀다
무꽃이 핀다

나는 들고 간 대나무 장죽을 들고 검은 돌담을 내리치기 시작하였다, 흡사 큰 북을 두들기듯이, 깨어나라, 깨어나라, 피어나라, 피어나라.

더 이상 무를 뽑지 않았다, 이미 그 봄바람의 발기에 온통 힘을 다 써버린 무들은 꽃이 무성해질수록 속은 텅텅 비어갔고 뻥뻥 바람이 들어갔고 늦봄 잔뜩 씨앗 깍지가 여물어 갈 즈음에는 다시 연갈색으로 수명을 다해가는 것이었다.

유독 무꽃 사이로 흰 나비 노랑나비들이 수만 마리 태어나 날아다녔다, 아아, 그 수많은 꽃들과 어린 생명들. 그 강렬한 기운 속에서 나는 더 이상 나이를 먹을 수가 없었다. 여기서 나이를 먹지 않는다는 것은 태어남과 죽음 그리고 흥하고 쇠함의 과정은 그저 모든 자연의 일부분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뜻이다.

그 흰 눈 내린 듯, 싸하게 가슴 에이는 무꽃의 향기와 애틋함을 홀로 삭이며 ‘첫 눈’ ‘무꽃’ ‘무꽃 필 때’ 세 편의 시(詩)가 씌어졌다. [글 문상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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