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 타작의 계절이다. 올해 아버지는 밭 두 곳에 콩을 갈았다. 올해 유독 비가 많이 쏟아졌고 콩은 자신이 콩 나무임을 증명이나 하겠다는 듯 쑥쑥 컸다. 콩만 크면 좋은데 잡풀들도 쑤욱 자라 어떤 것들은 콩보다 더 위로 솟아났다. 두 밭 중에서 한 곳은 콩보다 잡풀이 더 많아 수확을 포기한 채 트랙터로 갈아버렸고 한 곳은 잡풀을 계속 뽑아 그나마 콩 수확을 기대하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콩나무 같던 콩들은 무성한 잎을 떨어트리고 나자 난쟁이처럼 작아져 있었다. 잡풀을 뽑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잡풀들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있어서 아버지는 콩 꺾는 기계를 이용할 수 없다고 하셨다. 작년에는 콩도 잘 자라고 잡풀도 없어서 콩 꺾는 기계로 작업했던 터였다. 기계가 밭을 돌아다니면서 콩 가지를 기계 안으로 훑어 넣으면 콩 타작까지 한 번에 해결됐다. 기계 안이 콩으로 차면 부대에 담기만 하면 돼서 일이 수월했다.
기계를 쓸 수 없게 되자 온 가족이 쪼그리방석 하나씩 차고 콩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주말을 콩 꺾기에 다 투자했지만 끝내지 못했고 나는 미리 썼어야 하는 원고들이 밀려 있어서 안절부절못했다. 평일 오전에 잠깐 콩 꺾기를 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일이 있다고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어머니는 아침에 밭까지 태워주라고 부탁했고 부모님을 밭에 내려드리자 갈등이 생겼다. 시간이 날 때 미리미리 원고를 써 두지 못한 자신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 내가 오전에 도와주면 부모님이 덜 고생할 것이라는 분명한 사실과 아직 소재를 찾지 못했다는 체념에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옷을 갈아입고 다시 밭으로 향했다. 일하면서 아픈 허리를 두드리며 최근에 읽은 찰스 부코스키의 ‘망할 놈의 예술을 한답시고’라는 시집의 내용을 생각했다.
이 시집은 누군가의 글에서 제목을 읽은 적이 있는데 제목 자체가 원색적이라 기억에 남았다가 구매하게 되었다.
‘술에 젖은 어둠을/ 빠져나와/침실로 가면서/함순을 생각한다./글 쓸 시간을 벌기 위해/ 자기 살을 먹었던/ 그를.’(안녕하세요, 함순 씨 중)
‘난 내 예술을 위해 굶주렸고,/망할 놈의 5분, 5시간/ 5일을 버느라/ 배를 곯았어./ 내가 원한 건 그저 글을 쓰는 거였지./ 명성, 돈은 중요하지 않았어./ 난 그저 글을 쓰고 싶었는데/ 그들은 내게/ 공장 생산 라인/ 펀치 프레스 앞에 서라고/ 백화점 창고 직원이 되라 했어.’(죽음이 내 시가를 피우네 중)
‘작가라면 거의 누구나/ 자기 글이 특별하다고/ 생각한다는.// 그것은/ 흔한 일이다.// 바보가 되는 건/ 흔한 일이다.// 그 순간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종이를/ 찾아/ 다시/ 쓰기 / 시작했다.’ (작가 중)
‘글쓰기는 내게/ 젊음의 샘/ 나의 창녀/ 나의 사랑/ 나의 도박이었다.// 신들이 나를 망쳐놓았다.// 그래도 이봐, 난 아직/ 운이 좋아./ 작가의 벽에 부딪혔다는/ 글이라도 쓰는 게/ 아예 못 쓰는 것보다는/ 낫잖아.’(세르반테스는 오직 하나 중)
시집에는 글 쓸 시간을 확보하지 못하는 작가의 고뇌도 담겨 있고 작가의 벽에 부딪혀 글을 쓰지 못하는 절망도 담겨 있다. 그러나 그 절망은 작가의 벽에 부딪혔다는 걸 소재로 글을 쓰고 있어서 운이 좋다고 긍정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자청비 원고 소재를 생각하지 못했다가 글 쓸 시간에 콩 꺾은 일을 소재로 쓰고 있는 거 보면 나도 운이 좋은 편일까.
글 쓸 시간을 확보하는 건 작가에게 물론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내 경험상 글 쓸 시간이 남아돈다고 해서 꼭 그 시간에 글을 쓰거나 좋은 글이 탄생하지는 않았다. 생활과 유리돼서 글만 쓴다고 해서 좋은 것일까. 작가도 생활인이다. 글을 쓴다는 건 세상과 소통하는 것이다. 자신이 작가임을 잊어버리지 않는다면 생활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삶의 부조리를 찾아내는 매의 눈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을 꾸준히 쓰고 절망하고 다시 일어서는 걸 반복하는 게 작가의 삶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