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5-03 13:42 (금)
[자청비](109) 바로 이 순간이 삶이다
[자청비](109) 바로 이 순간이 삶이다
  • 이을순
  • news@newslinejeju.com
  • 승인 2023.08.24 09: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을순 소설가
이을순 소설가
▲ 이을순 소설가 ⓒ뉴스라인제주

그토록 무덥던 더위가 한바탕 빗줄기가 쏟아지자 한결 시원해진다. 나는 오랜만에 책장을 정리해본다. 며칠 전 시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후라서 그런지 아직도 가슴에 휑한 구멍이 뚫려 있는 듯 허전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육신의 고통에서 벗어난 아버님의 영혼은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책장 한쪽 구석에 오래전 신문스크랩을 해두었던 파일이 눈에 띈다. 그것을 꺼내 들춰보니 법정 스님의 강연 기사도 있다. “도착지와 시간을 먼저 생각하면 거기에 갇혀, 가는 길을 즐길 수 없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은 과거나 미래가 아니라 바로 이 순간입니다. 이 순간을 살 줄 알아야 합니다.” 지금 보고 말하는 모든 것이 ‘業’을 만든다고 한다. 하루에 한가지라도 착한 일 하면 성공한 날이고, 또 시간을 즐기는 사람은 그 영혼의 밭이 풍성해진다는 법정 스님. 2003년 9월 광주 남도 예술회관 초청 강연에 실린 기사다. 그렇다면 영혼의 밭이 풍성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사람은 자신에게 닥친 죽음의 공포마저도 초월할 수 있는 것일까? 해탈의 경지에 이른 스님들처럼 말이다. 평범한 인간인 내겐 영혼의 밭에 잡초만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듯해 문득문득 그런 의문이 들 때가 있다.

그날 양지 공원에는 많은 유족으로 붐볐다. 사람이 죽으면 화장하는 문화가 되어서인지 그곳 사람들도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호실마다 유족들과 망자와의 마지막 인사를 나눌 수 있는 제를 올리는 짧은 시간이 주어졌다. 그 절차가 끝나면 화장하는 장소로 옮겨졌다. 그 무렵 다른 호실에서 가슴에 맺힌 울음소리가 크게 들려와 절로 시선을 돌렸다. 얼핏 영정 사진을 보니 젊은 분이었다. 유족들은 어머니를 부르며 목놓아 울고 또 울며 좀처럼 자리에서 일어날 줄을 몰랐다. 그 어머니란 분이 아마도 갑자기 세상을 떠난 듯했다. 대기실 앞 전광판에는 화장하는 안내 순번이 적혀 있었다. 그중 ○○○아기, 라는 이름을 보는 순간 태어날 때는 순번이 있어도 죽을 때는 순번이 없다는 것을 다시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아버님은 96세의 장수를 누리다가 편안하게 영면에 드셨으니 그 얼마나 복되고 감사한가. 그런데도 막상 세상을 떠나자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기만 한 것이다. 삶과 죽음이 너무나 가까이에서 밀착되어 있다는 것도 슬프고 우리네 죽음이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내일 또한 두려워서 더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인간은 어차피 빈손으로 떠나는 인생이지만, 숨을 쉬는 동안이라도 진정한 행복이 뭔지 그것을 누려볼 수 있다면 그 얼마나 축복된 삶인가. 그러나 대부분 사람은 하루하루 열심히 살다가 어느 날 육신이 병들고 나날을 시름시름 앓다가 요양병원이나 요양원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기에 나이가 들수록 종교가 더 필요한지도 모른다.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을 혼자가 아닌 신의 손을 붙잡고 떠날 수 있다는 마음의 위안 때문에 말이다.

예전에는 싸늘한 공기가 감도는 영안실에 들어설 때면 참으로 두려웠다. 칸칸이 시신 보관용 냉장실에 누워 있는 시신들의 영혼이 주위를 떠돌고 있을 것 같은 공포감 때문이랄까. 한데 언제부터인가 누구에게도 해를 입히지 않는 죽은 자는 이제 더는 무섭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산 자가 더 무서울 따름이다.

얼마 전 서현역 칼부림 사건을 보라. 그 얼마나 참혹하고 무서운 세상인가. 묻지마 살인 사건과 폭행이 우리 사회에서 번번이 일어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정신병자들이 인간 시한폭탄이 되어 거리를 배회하고 있으니 너나 할 것 없이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몸조심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게 자신을 위한 삶인지를 스스로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 오늘 문득 법정 스님의 강연 기사를 읽어보니 허전한 내 가슴에 뭔가가 채워지는 기분이다. “성숙엔 시간이 필요합니다. 씨앗이 꽃 피고, 열매 맺기 위해선 4계절이 필요합니다. 현명한 사람은 움켜쥐기보다는 쓰다듬기를, 곧장 달려가기보다는 구불구불 돌아가기를 좋아합니다.” 순간순간이 나를 만들어 나간다는 스님의 강연 기사와 스님의 모습을 보자 마치 법정 스님이 다시 살아 돌아온 착각마저 든다.

아버님 살아생전에 자주 찾아뵙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려 죄송했는데, 이제 그 마음도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은 누구나 때가 되면 떠나는 법. 다만 아버님이 나보다 먼저 떠났을 뿐이라고 생각하면 굳이 마음 허전해 할 것도 없었다.

지금 아버님은 저 하늘나라에서 당신의 아들, 딸, 며느리, 사위와 손자 44명과 손손자 22명을 내려다보고 있으리라. 사후 세계가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자신의 마음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법정 스님의 말씀대로 ‘바로 이 순간이 삶’이라는 것에 나는 공감하면서 책장 정리를 끝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신대로5길 16, 수연빌딩 103호(지층)
  • 대표전화 : 064-745-5670
  • 팩스 : 064-748-5670
  • 긴급 : 010-3698-0889
  • 청소년보호책임자 : 서보기
  • 사업자등록번호 : 616-28-27429
  • 등록번호 : 제주 아 01031
  • 등록일 : 2011-09-16
  • 창간일 : 2011-09-22
  • 법인명 : 뉴스라인제주
  • 제호 : 뉴스라인제주
  • 발행인 : 양대영
  • 편집인 : 양대영
  • 뉴스라인제주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뉴스라인제주. All rights reserved. mail to news@newslinejeju.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