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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순진의 시의 정원](9) 냉이꽃
[양순진의 시의 정원](9) 냉이꽃
  • 양순진
  • jeju@newslinejeju.com
  • 승인 2020.04.22 10: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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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시인
손택수 시인
▲ 손택수 시인 @뉴스라인제주

냉이꽃

손택수

냉이꽃 뒤엔 냉이열매가 보인다
작은 하트 모양이다 이걸 쉰 해 만에 알다니
봄날 냉이무침이나 냉잇국만 먹을 줄 알던 나,
잘 익은 열매 속 씨앗은 흔들면 간지러운 옹알이가 들려온다
어딜 그렇게 쏘다니다 이제사 돌아왔니
아기와 어머니가 눈을 맞추듯이
서로 보는 일 하나로 가지 못할 곳이 없는 봄날
쉰내 나는 쉰에도 여지는 있다
나는 훗날 냉이보다 더 낮아져서,
냉이뿌리 아래로 내려가서
키 작은 냉이를 무등이라서 태우듯
들어올릴 수 있을까

그때, 봄은 오고 또 와도 새
봄이겠다

- <붉은 빛이 여전합니까>, 창비, 2020

 

양순진 시인
▲ 양순진 시인 @뉴스라인제주

'시'에게 늘 고맙다. '시'를 몰랐다면 튤립이나 장미처럼 화려한 꽃에만 관심을 기울였을 것이다. '시'를 읽고 쓰면서 작디 작은 봄까치꽃, 고마리, 꽃다지, 며느리밑씻개, 냉이꽃도 알게 되고, 냉이꽃에도 좁쌀냉이, 황새냉이, 미나리냉이 등 별의별 종류가 많다는 걸 알았다. 작디작은 것이 더 소중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희열도 맛보았다.
이 시인도 그랬나보다. 2017년 청소년시집 <나의 첫 소년>에 '냉이꽃 한 송이 때문에'라는 시가 실려 있는데 골목 담벼락에서 냉이꽃을 발견하고는 '여기가 나의 신대륙, 꿈에 그린 오지'라 표현했다. 즉, 냉이꽃에게서 우주를, 천국을 발견한 것이다.
이 대목은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순수의 전조 Auguries of Innocence' 도입부와 상통한다.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우주를
들꽃 한 송이에서 천국을 보려거든
그대 손바닥 안에서 무한을
한 순간 속에서 영원을 붙잡으라

그 후 2020년 출간한 <붉은 빛이 여전합니까>라는 이 시집에 다시 '냉이꽃'이 실렸는데 지금은 냉이꽃에 대한 마음이 더 깊어졌음을 알 수 있다. 하트 모양의 냉이열매도 발견하게 되고, 냉이보다 더 낮아져서 냉이 무등을 태우고 싶다는 자연시인의 철학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 어딜 그렇게 쏘다니다 이제사 돌아왔니'라며 현실적 삶에 젖어들다가 다시 '시'의 세계로 귀환할 수 있었음이 마치 냉이꽃 때문이라는 듯 서정시인의 자리에 귀의했음을 고백하고 있다.
<호랑이 발자국>, <목련전차>, <나무의 수사학> 등 이미 서정적 시로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그는 6년만에 이 시집을 내며 '시인은 역시 시를 써야 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시는 잊혀진 사물, 폐허가 된 지축처럼 되어버린 사람들을 들여다보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라고 밝혔다.
보통은 사람과 식물과 동물 등 삼라만상에 반해 시 쓰는 경우가 많은데, 나는 시를 먼저 알고 삼라만상에 반했다. 시를 몰랐다면 나를 깨우치고 자연을 배우고 삶의 진미조차 몰랐을 것이다. 작디 작은 꽃과 곤충이나 동물, 우주의 신비함조차 껴안지 못 한 채 이 세상과 하직했을 것이다.
올봄도 오름 오르며 양지꽃, 산자고, 할미꽃과 눈 맞추기 위해 한없이 몸을 낮추었다. 쑥과 달래, 그리고 고사리를 캐기 위해 수천 번 무릎을 꿇었다. 코로나가 전세계를 뒤흔들어도 자연은 변함없다. 자연에서 배우는 인간 또한 포기를 모른다. 끄떡없다.
코로나 19로 인해 한시적으로 출근을 못 하고 있지만 더 멋진 미래를 상상하며 대비한다. 작디 작은 냉이꽃과 대화하고 주변의 사람들과 세상과 접속하며 읽고, 쓰며 오늘을 견딘다. 손택수 시인님의 '냉이꽃'을 암송하기도 하고 윌리엄 블레이크의 조언을 되새기며 말이다.
'인간은 땀 흘려 일해야 한다. 슬퍼해야 한다, 배워야 한다, 잊어야 한다. 그리고 돌아가야 한다. 자기가 떠나온 어두운 골짜기로 또 새로운 노역을 위하여'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네 조아 The Four Zoas' 中)
이 어두운 시간이 지나면 어김없이 새 날들이 올 것이고, 그 때 봄은 오고 또 와도 새봄이겠다. 새삶이겠다, 새역사이겠다, 더 밝고 찬란한. [글 양순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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