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진하 시인
<편집자주>영주일보는 시인의 예리하고 독창적인 일상의 삶을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양순진 시인이 써내려가는 <시의 정원>칼럼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우리들의 가슴에 촉촉한 단비가 되길 기대합니다.
봄의 첫 문장
고진하
온종일 집에 혼자 있었네
자주 열어보던 인터넷 창도 열지 않고
잉크가 번지는 종이정원에도 얼씬거리지 않았네
잔설 위에 쌓이는 눈송이 같은
첫 문장을 받아쓰고 싶은 생각도 없었네
아궁이의 불을 지피고
개똥 무더기 치우고 나서
혹한에 얼어 죽을까 염려되어
겨우내 감싸둔
어린 감나무의 짚붕대를 풀어주었네
짚붕대를 풀자
잎을 꽉 다문 연둣빛 잎눈이
온종일 침묵을 지킨 내 입을 열었네
오, 살아 있었구나!
무심코 잎눈과 나눈 첫 문장이었네
첫,이란 가장 큰 우주의 울림이다. 첫 탄생, 첫 입학, 첫 사랑, 첫 합격, 첫 취직, 첫 시집, 그리고 첫 죽음...오늘 처음 문 여는 '시의 정원' 첫 시도 첫, 이다. 우리는 그 첫, 을 다 통과하면서 살아간다.
새벽 산책길에서 어느새 봄까치꽃도 부시시 보랏빛 눈 뜨고 외쳤다. 봄입니다, 라고.코로나19로 앓고 있는 봄. 모두 문 닫고 눈 닫고 입 닫고 마음 닫는 이 3월에 어린 감나무 잎눈과 벚나무 잎눈에게 뭐라고 말해줘야 할까.
조금만 기다려, 올봄은 한 걸음 늦게 천천히 오니까. [글 양순진 시인]
<저작권자 © 뉴스라인제주(http://www.newslinejeju.com)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