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5-05 10:08 (일)
[연륙교](11) 보름달 빛 추억 속으로
[연륙교](11) 보름달 빛 추억 속으로
  • 신광숙
  • news@newslinejeju.com
  • 승인 2024.03.12 09:44
  • 댓글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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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광숙 시인
신광숙 시인
▲ 신광숙 시인 ⓒ뉴스라인제주

“ 엄마 소지(燒紙)가 올려졌다 합니다”

동생의 기별에 어머니는 그제야 아궁이에 불을 지피시며 바쁜 손놀림으로 동동걸음을 치신다.

하얀 쌀가루를 두툼하게 두르고 붉게 삶은 팥고물을 켜 켜 이 뿌린 떡시루를 쪄내고 청수(淸水)를 받쳐 들고 장독대에 올려 우리 가족의 안녕을 위해 두 손 모아 기도를 올리시던 정결한 뒷모습이 눈에 선 하다.

정월 열나흘 둥근달이 떠오르면 동네 어른들은 모두 목욕 재개하고 깨끗하게 의관(衣冠)을 정제(整齊)하고 당(堂)집이 있는 마을 뒷동산으로 올라, 온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제(祭)를 올린다.

그 제(祭)를 올릴 때 집집이 소원을 적은 소지(燒紙)를 태워 올려야만 각 가정에선 그때 서야 준비했던 떡시루에 불을 붙여 떡을 쪄내고 각자 가정의 소원을 빌었던 정월보름, 내 어릴 적 기억이 오늘 대보름을 맞아 새록새록 떠올려 본다.

내가자란 곳은 충청남도 아산시 면 단위 소재지로 100여 가구가 살던 비교적 부농들로 형성된 부자 동네로 기억된다.

설날부터 보름까지 마을은 축제처럼 웃어른들께 세배를 드리고 윷놀이, 널뛰기, 제기차기, 연날리기, 쥐불놀이로 서로의 음식과 술을 나누고 덕담을 주고받으며 축제처럼 보낸다. 그 축제의 절정은 보름날 세 팀으로 나뉜 윷놀이 대회로 온 마을이 떠들썩, 승부를 가르며 풍악을 울리고 지신밟기로 집집을 돌며 흥겹게 보낸다. 해가 지고 보름달이 떠오르면 당(堂)집에 올라 엄숙히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빌었던 풍습을 기억한다.

그 어릴 적 엄마가 해 주시던 오곡밥과 아홉 가지 나물들도 잊을 수 없다. 찹쌀에 팥, 수수, 좁쌀, 콩을 넣어 밥을 짓고 취나물, 무청 시래기, 아주까리잎, 고구마 순, 호박오가리, 가지 오가리, 무나물 등을 들기름에 볶아낸 묵은 나물들로 비벼내는 비빔밥의 맛이란 지금의 어떤 맛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넉넉히 준비하여 부뚜막에 얹어 놓고 밤사이 누군가가 와서 가져갈 수 있도록 배려했던 마음도 잊지 않았었다. 밤을 새워 놀다 보면 출출해진 속을 채우려 어느 집 부엌이든 들어가면 소복이 준비해 둔 허락한 음식들로 밤참을 나눌 수 있었던 대보름의 후한 인심을 잊을 수 없다.

또 한 가지 뚜렷이 기억하는 것 중 하나 “더위 파는 일.”
아침에 눈을 뜨고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내 더위 사가라~”
고 외치는 말도 정월보름 날 아침이면 공공연히 행해지던 일이다.

왜 그래야만 했는지는 자세히 모르겠으나 아마도 4월 1일 만우절에 공공연한 거짓을 말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 아닐지 싶다. 여름이 길었던 탓이었을까? 요즘처럼 냉방기기도 없고 해충도 심했기에 부스럼도 많이 앓았었던 것 같다. “부럼”이라고 딱딱한 견과류를 깨물며 긴 여름에 부스럼을 예방한다고 건네주시던 호두, 밤, 땅콩도 어쩌다 먹어보는 귀한 간식거리였었다.

지금은 그런 풍습이 사라져 가는 것 같아 못내 아쉬워진다.

이렇듯 내 어릴 적 세시 풍습은 요즘 젊은 세대들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여럿이서 어울려야만 할 수 있었고 재미도 서로 나누어야만 느껴졌는데 요즘 우리 손주들의 놀이는 그렇지 않은 듯해서 은근히 측은해진다. 혼자서 스마트폰과 게임으로 컴퓨터와 씨름하는 시간과 학원을 오고 가는 모습이 안쓰러운 것은 할머니의 괜한 기우(杞憂)일까?

아마도 세월이 많이 흐른 듯싶다.

고향 집 울타리 안 댓돌 위에 나란히 벗어놓은 우리 가족 고무신이 달빛에 젖어 아롱거리며 스쳐 간다. 나이 먹으면 옛 추억으로 산다고 하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정월 대보름 맞이 세시 풍습을 떠 올리며 지나간 세월이 한없이 그리워지는 것은 나이 탓 이런가.

오늘 저녁 식탁에 넉넉히 올렸던 오곡밥과 나물들을 먹으면서 멀리 떨어진 자식과 손주들, 형제, 옛 동무들이 보고파지는 밤이 어둠 따라 흘러간다.

올 한 해도 어김없이 정월 대보름을 맞이하고 흐린 날씨로 구름에 가려 달빛이 보이지 않음이 못내 아쉬워도 마음속 간절한 소원으로 한 해의 안녕을 빌어본다.
 

보름달 빛 어머니
 

신광숙
 

휘영청
둥근달 빛에 우리 어머니 염원 띄우고
가슴 속 깊은 사랑 두 손으로 받쳐 올릴 때
장독대
청수淸水 한 사발에 고운 달빛 두둥실

구름도
잠시 머물고 바람도 잠든 밤
흥건한 달빛, 사랑으로 적셔질 때
어머니!
사무친 그리움
고운 하늘에 띄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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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디 2024-04-10 17:50:18
풍성한 추억은 좋은 작품의 재료이자 재산이지요. 신 시인님의 글을 읽으며 저도 제 유년을 꺼집어내 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바다 2024-03-12 23:35:05
정월 대보름 어릴적 친구들과 함께했던 놀이와 까르르 웃음소리 해맑던 시절이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글이네요 어머니를 그리는 애잔한 싯귀에 아련한 그리움이 되어 사무치네요

한백 2024-03-12 18:51:31
좋은 추억들이 풍성하시네요.
복조리 사려~~ 하며 새벽을 깨우던 소리도 어렴풋이 기억이 납니다.
지나간 것이 색이 있다면 아마 엷은 미색일게라.

오은주 2024-03-12 18:20:10
나도 가신님 우리 엄마~~~ 생각에 쁘듯함이 마음으로 스며듭니다.

실비아 2024-03-12 16:17:23
와~ 꿈결인듯...
정말 좋은 추억을 가지고 계시네요^^
유년의 세시풍속이 그립습니다
세대간 격차도 심하고 여전히 어리둥절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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