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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청비](125) 한 해를 보내면서
[자청비](125) 한 해를 보내면서
  • 이을순
  • news@newslinejeju.com
  • 승인 2023.12.14 0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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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을순 소설가
이을순 소설가
▲ 이을순 소설가 ⓒ뉴스라인제주

이제 12월도 얼마 남지 않았다. 개인적인 삶을 돌아보면 아쉬움이나 미련 같은 것은 없다. 하지만 우리 경제가 많이 어려워져 있어 그게 걱정스럽다. 물론 세계 경제도 마찬가지이다. 코로나가 끝나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일어나고, 올해는 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도 싸우고 있다. 이런 전쟁들은 언제 끝날지 모르고 지금도 수많은 사람은 계속 죽어 나가고 있다. 며칠 전 이스라엘은 하마스의 지하터널인 땅굴을 대대적으로 공격하기 위해 바닷물을 끌어 올려 무자비하게 물 폭탄을 쏘았다고 한다. 그 공격으로 땅굴 속의 사람들은 해일 같이 밀려오는 물을 피할 새도 없이 참혹하게 죽었으리라.

북한과 마주 대하고 있는 우리나라도 몹시 걱정된다. 부디 한반도에선 불바다가 일어나지 않기만을 바랄 뿐. 그래서일까, 문득 ‘태극기 휘날리며’ 영화가 떠올랐다. 원빈(진석역)과 장동건(전태역)의 형제애가 무엇보다 감동적이었다. 이념도 사상도 없이 오직 동생의 생존을 위해 전쟁 영웅이 되어가는 진태와 자신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형이 원망스러운 동생 진석. 1950년 6월의 서울 종로 거리와 그 시절의 삶의 풍경도 볼 수 있었다. 6월, 전쟁으로 죽어간 수많은 군인과 국민의 죽음에서 민족의 깊은 상처와 아픔도 함께 느꼈다. 같은 민족끼리 총구를 겨누며 싸워야 했던 이념과 사상이 뭔지를 영화는 상기시켜 주었다.

올해 우리나라 수출은 매우 부진하고 물가는 계속 오르고 서민들의 살림살이는 점점 팍팍해지는 고난의 연속이다. 고물가, 고유가, 고금리로 삶은 나날이 어려워지고 있다. 자금줄이 가뭄처럼 말라 너도나도 지난 IMF보다 더 힘들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2024년 한국경제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어느 경제 전문가는 더 어려워질 것이고 한다. 올해 높은 산을 힘들게 다 올라왔다고 생각했는데 내년엔 그 위에 또 산이 있는 격이라고 비유했다.

이런 격변의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과연 어떻게 사는 게 인생을 잘 사는 것인가를 생각하게 만든다. 물론 각자 자신만의 특별한 베란다가 있으리라. 아무리 세상이 힘들고 어렵더라도 우리는 자신만의 베란다에서 희망을 키우며 내면과 마주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자신만의 마음의 비타민에 던져진 씨앗이 새싹이 돋아나고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꽃도 활짝 피어나면 그게 바로 꿈을 이루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인생을 산다는 것은 어쩌면 내면에 희망의 씨앗을 심는 일인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그 씨앗을 정성껏 키워 세상을 비추는 삶의 등불이 되었다.

재주와 용모가 빼어난 조선 시대의 여성, 허난설헌에 관한 글을 여기 ‘자청비’ 지면에 올리며 나는 한 해를 마무리해본다.

그녀는 세 가지의 한을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합니다.
하나는 여자로 태어난 것.
다른 하나는 조선에서 태어난 것.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김성립’의 아내가 된 것.
그녀는 짧은 생에 커다란 아픔 앓이만을 하다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강릉의 명문가에서 두 번째 부인의 둘째 딸로 태어나 아버지는 경상 감사를 지냈던 동인의 영수이고(화담 서경덕의 제자) 큰오빠 허성은 이조, 병조 판서를 둘째 오빠 허봉은 홍문관 전한을 지냈고 홍길동전의 저자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허균 역시 형조, 예조 판사를 지낸 인물입니다. 임금은 동생 허균을 너무나 아끼어 역모에 가담하지 않았노라고 말하라며 울며 애원까지 하게 되지만 결국 허균은 봉건 사화 타파와 이상 세계 실현에 실패한 것을 슬퍼하며 죽음을 택합니다.

허날설헌의 본명은 초희(楚姬), 벌호는 경번(景樊), 난설헌은 호라고 합니다.(許蘭雪軒, 1563~1589: 명종18~선조22) 그녀는 어릴 적부터 놀라운 글로 찬사를 받아왔으며, 당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도 거부할 수조차 없었던 현실에 대한 한을 시에 담아 표현하였습니다.

규원(閨怨)

바람띠 비단치마 눈물 흔적 쌓였음은
임그린 1년 방초의 원한의 자국
거문고 옆에 끼고 강남곡 뜯어내어
배꽃은 비에 지고 낮에 문은 닫혔구나
달뜬 다락 가을 깊고 옥병풍 허전한데
서리친 갈밭 저녁에 기러기 앉네
거문고 아무리 타도 임은 안 오고
연꽃만 들못 위에 맥없이 지고 있네

그녀는 미처 피지도 않은 나이 15세 때 ‘김성립’과 결혼하게 되었다. 남편 김성립의 방탕한 생활과 기방 출입은 그녀를 더욱 고독하게 만들었다. 반면 김성립은 늘 재주가 빼어난 자신의 부인 난설헌에게 열등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늘상 허균의 눈에도 그리 보였다. 그래서 그는 “문리(文理)는 모자라도 능히 글을 짓는 자, 글을 읽으라고 하면 제대로 혀도 놀리지 못하는데 과문(科文)은 우수한 자”라고 매형을 절하 평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그녀의 결혼 생활은 불행할 수밖에 없었고, 시댁에서는 밖으로만 도는 아들과 아들보다 뛰어난 며느리를 곱게 보지 않았다.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푸른 난세는 채색 난새에게 기대였구나.
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이 시는 그녀의 나이 27세 되던 해 임종을 앞두고 적은 글이다. 그녀는 일찍이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있었던 듯싶다. 어느 날 그녀는 갑자기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는 “금년이 바로 3.9의 수(3×9=27세를 뜻함)에 해당되니, 오늘 연꽃이 서리를 맞아 붉게 되었다”라고 적고 눈을 감았다고 전해진다. 그녀가 죽기 전, 자신의 모든 작품을 태워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하는데 난설헌의 글이 너무도 아깝고 억울하여 동생은 모두 태워 버리지는 않았다고 전해 내려온다. 그녀가 만일 평범한 가정 속에서, 한 남자의 아내로서 사랑받고 한 집안의 며느리로서 대우받으며 자식들을 떠나보내지 않았다면 이렇게 가슴 저미는, 설움 담긴 글들을 우리는 단 한 편도 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남편 김성립은 아내가 죽은 후 재혼하였으나, 아이를 얻지 못하였고 죽은 후에도 본처가 아닌, 후처와 합장하였다고 한다. 당시 숨 막히는 유교 사회에서 철저하게 버림받고 희생당한, 빼어난 미모의 재능의 소유자인 허난설헌의 아픔이 40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녀의 몇 편의 시와 그림 속에 배어있다. 당내의 학자였던 오빠 허봉에게서 ‘두보의 소리를 내게서 들을 수 있으리라’라는 극찬받았던, 시대를 잘못 타고 난 불운한 천재 허난설헌의 삶은 곧 남존여비, 여필종부의 유교적 사상과 가치관에 희생된 한 여인의 슬픔이라기보다 한 시대의 슬픔이라고 할 것이다.

곡자(哭子)

지난해 사랑하는 딸을 여의고
올해는 사랑하는 아들 잃었네

슬프고 슬픈 강릉의 땅이여
두 무덤 마주보고 나란히 서 있구나

백양나무 숲 쓸쓸한 바람
도깨비 불빛은 숲 속에서 번쩍이는데
지전(紙錢)을 뿌려서 너의 혼을 부르고
너희들 무덤에 술 부어 제 지낸다
아! 너희 남매 가엾은 외로운 혼은
생전처럼 밤마다 정답게 놀고 있으니

이제 또다시 아기를 낳는다 해도
어찌 능히 무사히 기를 수 있으랴
하염없이 황대의 노래 부르며
통곡과 피눈물을 울며 삼키리

출처: ‘김억 한시역선’, 허난설헌의 ‘한의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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