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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태식 칼럼](7)불타는 마을
[현태식 칼럼](7)불타는 마을
  • 영주일보
  • jeju@newslinejeju.com
  • 승인 2015.04.13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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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태식 전 제주시의회 의장

▲ 현태식 전 제주시의회 의장
그러던 어느날 야단이 났다. 밤에 동리 사람들이 모여 어깨동무(스크럼)를 하고 ‘왓샤, 왓샤’ 구호를 외치며 떼지어 왔다갔다 하는 소리가 들려 오더니 우리 마을 서쪽 마을인 노형마을이 불바다가 된 것이다.

군인들이 올라와서 온 동네를 불질러 버렸다는 것이다. 동네사람들이 우리를 달갑게 보지 않은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집 뒷켠의 남의 밭담을 허물어서 마차길을 내고 그날로 세간을 대충 싣고 용담동(먹돌새기)외삼촌 댁으로 내려왔다. 우리는 이 때부터 혹독한 고생길로 들어선 것이다. 철부지인 나는 나중에 알았지만, 이것이 1948년에 일어난 4·3사건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외삼촌은 애월면 유수암리에 사시다 용담동 먹돌새기로 이사왔지만 살림이 넉넉치 못해서 몹시 궁벽했다.

외삼촌 댁은 아주 작은 초가집이었다. 연동 배두리에서 맨 몸이다시피 해서 내려온 우리 가족들은 외삼촌네집 앞 마당에 억새를 엮어 몽골인 집(파오) 모양으로 움막을 만들어 살기 시작했다. 출입구는 기어서 드나들만큼 비좁았고 문은 거적떼기로 달았다. 맨땅바닥에 보리짚을 깔고 그 위에서 잠을 자며 살았다. 큰아버지네 식구, 작은아버지네 식구들도 똑같이 그렇게 살았다. 비가 내리면 바닥에 깐 보리짚이 젖어버려 견딜 수가 없는데 물이 흥건히 고일때도 있었다.

낮에는 산쪽 사람 몰래 살그머니 밭에 가서 무도 뽑아 한 짐 지어 오고, 땅 속에 저장해 뒀던 고구마도 가져다 찌어 먹어서 그럭저럭 죽지않고 살아갔다. 이런 과정을 겪은 우리집 식구들은 웬만한 어려움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에도 결석은 많이 했지만 학교는 다녔다. 나는 일학년이 끝나서 2학년으로 진급할 때는 월반 시험에 합격해서 3학년이 되었다. 비록 4·3사건 때문에 학교는 여러번 결석했지만 3학년 때만 우등상을 못받았고, 4·5·6학년 때는 우등상을 놓치지 않았다.

연동에서 학교 다닐 때 일이었다. 우리 집 북쪽에 있는 소나무 밭에(옥밤머세 : 올빼미가 우는 언덕의 뜻으로 데서 붙인듯 하고 머세는 돌빌레 이루어져 경작도 못하는 돌밭의 뜻) 공산주의에 물든 사람들이 매일 보초를 서기 때문에 큰 길로는 학교에 갈 수가 없었다. 둘째 형님과 나는 삼태기에 책가방을 숨기로 말똥이나 쇠똥 줏으러 가는 것처럼 위장해 학교와 반대방향으로 가다가 샛길로 빠져나가 덤불 숲 속에 삼태기는 숨기고 책가방을 들고 학교로 달려가니 지각하는 것이 일과처럼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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