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5-02 22:22 (목)
[자청비](133) 어느 눈 오던 날
[자청비](133) 어느 눈 오던 날
  • 송은실
  • news@newslinejeju.com
  • 승인 2024.02.22 09:29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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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실 봉아름문학회 회장
송은실 봉아름문학회 회장
▲ 송은실 봉아름문학회 회장 ⓒ뉴스라인제주

지난 1월 하순 어느 날 퇴근하려고 사무실 밖을 나왔는데 언제 내렸는지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 내려앉은 어둠을 밀어내고 있었다. 아침에는 날씨가 좋았기에 저녁에 눈이 왔을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하얀 세상이 예쁘고 눈 위를 겅중겅중 뛰는 강아지 마냥 즐거웠지만 그건 잠시, 집에 갈 생각을 하니 심란했다. ‘운전이 가능할까?’걱정되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일단 출발해보기로 했다. 비상등을 켜고 천천히 가고 있는데 앞에 가던 차가 점점 느려지더니 차도를 벗어나 인도 쪽으로 세우는 것이었다. 운전자가 내려서 도로상황을 살펴보고 잠시 망설이다가 담배를 피워 물었다. 앞에 가던 차들이 가지 못하고 있나보다 생각하고 나도 내려서 살펴봤다. 서너 대의 차량이 나무늘보처럼 늘어져 있고 한 차량은 다른 차량을 피하며 아슬아슬 곡예를 하며 내려가고 있었다.

눈발은 점점 거세져가고 이대로 가다간 길이 완전히 얼겠다싶어 길가에 차를 세워두고 버스를 타야지 하고 인도 옆에 나란히 나 있는 돌담 옆으로 천천히 주차를 하고 내렸다. 버스정류장으로 가는데 아차! 버스비가 없었다. 내가 갖고 있는 신용카드는 교통카드겸용이 되지 않는 것이다. 순간 눈앞이 캄캄했다. 어떡하지? 차안에는 100원짜리 동전 몇 개는 있지만 버스비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동전을 더 많이 놔둘 걸’ ‘혹시 택시가 지나갈까? 집에 도착하면 차비를 드리겠다고 하면 되지 않을까?’이런 생각들이 스쳤다. 안절부절 발만 동동 구르다가 문득 앞에서 담배를 피우던 분에게 현금이 있을까 하여 “혹시 천이백 원이 있으십니까? 이체 해드릴게요” 했더니 그분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가진 게 없다고 했다. 아득했다. 절박한 심경으로 주위를 둘러보는데 이 마을 사람으로 짐작되는 분이 모래주머니를 들고 눈길 위에 뿌리고 계셨다.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그분에게 다가가 공손히 여쭈었다.

“선생님! 천이백 원만 빌려 주세요, 눈이 와서 버스를 타려고 하는데 현금이 없어서요, 이체해 드리면 안 될까요?” 아저씨는 나를 보더니 지금 현금이 없는데 잠간만 기다리라고 하고 어디론가 가셨다. 내 짐작대로 이 동네에 사시는 분이었고 집에 가신 것 같았다. 휴!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잠시 후에 오시더니 천이백 원을 내게 건네고는 모래를 마저 뿌리려고 돌아섰다. 나는 급히 아저씨를 부르며 계좌를 불러달라고 말했지만 손사래를 치면서 “됐수다”하고는 종종걸음으로 멀어져 갔다.

나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는 것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할 수밖에 없었다.

바람에 날아갈까 봐 받은 돈을 얼른 주머니에 넣었다.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는데 천사의 날개처럼 하얀 눈이 내려와 거리를 재우고 있었다.

사십분 정도 기다리니 버스가 왔다. “안녕하세요?”기사님을 보자 반갑고 고마운 마음에 인사가 저절로 나왔다. 자리에 앉아 창밖을 보니 길가의 나무들이 두껍고 하얀 롱패딩으로 무장하고 서서 나를 배웅해 주었다.

출퇴근 하며 매일 오가는 길이었지만 차를 타고 휙휙 지나던 때의 풍경과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살포시 내리는 눈을 보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불안에 떨었던 마음이 점점 가라앉고 편안해졌다. 승객은 서너 분 정도 밖에 타고 있지 않았지만 모두 이웃 같이 느껴졌고 기사분도 우리 동네에서 자주 보는 아저씨처럼 친근하게 느껴졌다.

하차할 시간이 다가올 즈음 기사님의 전화가 울렸다. 지금 내려가는 코스를 그대로 올라가야 하는 동료기사분이 도로 사정을 알아보려는 것이었다.

수화기 너머로 질문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그리고 들리는 기사님의 대답 “혹시 앞에 가는 차가 있으면 그것만 조심하고 오르막길은 힘껏 밟아 탄력 받아 가면 돼 너무 걱정 하지 말고, 충분히 갈 수 있어” 통화를 끝내자 순식간에 버스 안이 훈훈해졌다.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눈이 오는 날에는 주머니에 천이백 원을 가지고 다니다가 누군가 버스비가 필요하다고 하면 드려야지 하는...

이런 생각을 하다 문득 잊고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작년 겨울에 눈이 와서 버스를 탄 적이 있는데 한 아주머니가 버스에 오르고 카드를 승차단말기에 댄 순간 사용할 수 없는 카드라는 음성이 나오자 몹시 당황해했다. 순간 앞자리에 앉아있던 나와 눈이 마주쳤고 나는 버스카드(종량제겸용)를 가지고 있었기에 얼른 승차단말기에 카드를 댔다. 나에게 버스비를 주셨던 아저씨께는 갚지 못했지만 다른 분에게라도 미리 갚았다는 생각에 감사했다.

멀어져가는 아저씨와 그 어깨위에 살포시 내려앉던 하얀 눈이 지금도 보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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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소년 2024-02-22 19:56:06
맞아요..우리가 사는 세상은 눈속에서도 따스함을 느낍니다.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십시다

실비아 2024-02-22 11:01:38
눈은 오는데...
춥고 난감한 설국속에서도
따뜻한 마음으로 세상은 살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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