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밝히는 제주오롬 이야기
골메는 서귀포시 안덕면 창천리 564번지, 해변마을인 대평리, 감산리와 접하고 있다. 오롬의 해발 334.5m, 실제 높이 비고는 280m이다. 오름의 해발과 비고의 차이가 54.5m 인 것은 이 오롬은 해변 오름이기에 큰 차이가 없다. 오롬의 모양은 원추형 ‘라바돔’인데 용암이 분출하다 멈추고 식어져 현무암이 되었다. 그 모양새가 여전히 용암을 닮아서 라바돔(Lavadom. 용암언덕)을 이루고 있다(백록담은 조면암으로 이뤄진 라바돔이다).
골메 정상부에는 두 개의 ‘뿔바위’가 있고 동남사면에는 애기업개 돌(애기를 업은 모양의 돌) 등이 있다. 이 돌들은 퇴적층의 차별침식에 의한 기암괴석으로 알려져 있다. 남사면 계곡에 발달된 웅장한 퇴적층들은 수평의 층리를 이루고 있는데 이는 제주도 최대의 ‘화산쇄설성 퇴적층’으로 도내 오름 중 그 규모나 크기에 있어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골메의 이름은 실로 다양하다. 그러나 본디 난드르大坪里 일대 사람들은 이 오름 일대에 골짜기가 많다하여 '골메 <골뫼'라 불렀다. 이후 변음 되어 '굴메'라 했다는데 ‘굴메’는 제주어로 ‘그림자’라는 말이다. 해질녘이면 북쪽 골메가 난드르에 ‘굴미(제주어:그림자)’가 지니 ‘굴메’라 부른 것이다. 제주에서는 오롬을 뫼나 메, 미라 하기에 굴미나 굴뫼, 굴메가 유사하다.
고려 목종(제7대왕, 재위/12년, 997~1009) 때 제주도에 화산이 폭발하여 비양도와 골메가 솟아났다고 한다. 고려조정은 박사를 보내어 화산을 조사토록 했는데 박사는 왕에게 ‘상서로울 서瑞’자를 써서 서산瑞山이라고 보고하였다. 이후 그렇게 불리다가 나중에는 그 형상이 군막형태라 하여 ‘군산軍山’이라 불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보다는 제주어 골메>굴뫼가 먼저인데 이를 표기할 때 ‘군뫼’로 듣고 ‘군산軍山’이라고 쓰였을 거라는 게 맞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와서도 여러 명칭이 쓰였는데 『조선강역총도』에는 '굴산屈山', 『탐라순력도』나 『탐라지도병서』에는 '군산軍山, 『해동지도』에는 '군산악軍山岳, 『제주삼읍도총지도』나 『대동여지도』, 『탐라지초본耽羅誌草本』 등에는 ‘호산蠔山’으로 『조선지지자료』에서는 '군산群山으로 『조선지형도』에는 ‘군산軍山’이라고 각각 표기되어 있다.
골메는 여러 가지로 불리나 본디 ①골뫼에서>골메 ②굴메>가 나왔고 이후 역사적으로는 ③군산軍山, 군산악軍山岳, 군산群山, 굴산屈山이라는 표기는 모두 제주어 ‘골메-굴메를 음차한 것이며 ④서산瑞山은 이 오롬의 발생상황을 상서로움으로 보고-만약 나쁘게 말한다면 왕의 치적에 누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⑤호산蠔山‘은 ’골메‘가 해저에서 분화했기에 ‘굴조개 호蠔자’를 써서 ‘조개껍질들이 나타난 것을 증명하며 생성과정’을 표현한 명칭이다.
고려초기에는 ‘상서로운 산(서산瑞山)’으로 불리다가 나중에 군산軍山이라고 불렸다면 ‘목호牧胡의난(고려 공민왕 때)’을 진압하기 위해 여명연합군 수장 최영장군이 새별오롬(새성)에 진친 목호들을 격파한다. 고려군들은 목호들을 추격할 때 서귀포 법환리에 마지막 ‘막숙幕宿’을 치기 전에 군사적 요충지였을 이곳에 ‘군막’을 쳤을 것이다-그 이후 일본군, 4.3 때에는 좌익들이 이용했을 것이고-그래서 ‘군산軍山>군뫼>군메’란 명칭이 발생했을 것이다.
최초 본디어 골뫼>골메>는 굴뫼>굴메로 불리다가 고려후기부터 ‘군산’이란 명칭이 쓰였다면 이 같은 역사를 감안 해볼 때 고려 말 최영장군 이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본디어인 ‘골메’로 통일하는 게 옳다고 본다. 골메는 측화산으로 조선시대 봉수가 있었다. 동쪽으로는 구산봉수, 서쪽으로 송악봉수와 교신했다고 알려지나 봉수대 터도 표시도 없다. 제주도에는 봉수대 25개, 연대 38개가 있었으나 표시, 복원, 재현도 없으니 이 또한 제주의 역사와 문화를 무시하는 처사이다. 이점에 대해서는 제주자치도에 건의했으니 기대하는 바이다.
골메를 오르는 길은 세 곳이 있는데 이번에 가다보니 일주서로 상에 감산리 3거리로 들어가게 되었다. 지난 가을 골메를 찾았을 때 오롬은 온통 국화향이 가득하였다. 바위틈에 피어난 감국이 황금빛인데 하얗게 피어난 억새들까지 합하여 탐방하는 길손을 환영하듯 가을바람에 손을 흔든다. 백로를 앞둔 날, 감국과 억새는 피지 않았으나 사방을 바라보니 상쾌하다.
예덕나무는 아직 푸르고 우슬초, 달개비, 삼수새기, 며느리밑씻게가 비탈에 가득하다. 위로 올라갈수록 무릇, 짚신나물, 개요등, 돌콩 등이 보리수를 타고 오른다. 모시풀, 쌍동 등이 다른 곳 보다 많아 보인다. 구지뽕과 소나무, 제주산 고목들이 비탈 아래서부터 보인다. 구멍 나고 속이 빈 나무들이 모진 세월을 말하듯 한데 수리대나무들은 터널을 이루고 있다. 굴메는 봄이 무르익을 즈음 보랏빛 돌무꽃이 능선을 덮을 때가 가장 환상적이다.
골메 탐방로를 조금 더 오르면 좌측에 ‘구시물’이 있다. 그 옛날에는 기우제를 드릴 때 쓰일 만큼 성스럽게 여겼고 아들 점지를 바라는 사람들에겐 소원을 비는 곳이기도 했다. 일본은 대동아전쟁에서 본토를 막는 마지막 보루로 제주 땅 곳곳을 요새화 하였다. 그 때도 모슬포에 공군부대가 있었는데 모슬포가 코앞인 이곳은 당연히 요새화 했을 것이다. 작지만 식수가 있으니 한 두 소대는 주둔했을 것이다. 여기에 10여개의 반공호가 있는데 길이 9m, 폭 1m, 높이 1.7m이다. 당시에는 반공포-고사포들이 모두 하늘을 겨누고 있었을 것이다.
골메 정상에 서면 파노라마처럼 제주 남녘바다가 환히 펼쳐진다. 북쪽으로는 신산오롬, 더데오롬, 우보악, 동쪽으로는 멀리 한라산과 베릿네오롬, 구산봉, 바다로는 강정포구, 서귀포 앞 범섬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남쪽 바다로는 화순 금모래해수욕장, 형제바위, 가파도, 마라도가 보인다. 해질녘이면 산방산, 송악산 너머로 펼쳐지는 환상적인 황혼을 볼 터인데 때를 기다리지 못함이 너무 아쉽다.
골메는 백두산 천지보다 몇 배나 강한 에너지가 나온다고 한다. 이후 직접 체험해 보고 싶다. 난드르大坪里에서 해가 질 때면 북쪽의 오롬은 굴미>굴메(그림자)가 진다. 이제 서럽던 옛날은 덮어버리자. 뜨는 해 보다 지는 해는 더 아름답다 하지 않던가. 화순금모래 해수욕장 너머로 빛나는 남녘바다, 굴메야! 금빛 반짝이는 황혼을 보며 이제는 희망을 노래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