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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롬이야기](34) 막둥이 제주화산 골메, 그림자 진 굴메, 군사 요지 군산
[오롬이야기](34) 막둥이 제주화산 골메, 그림자 진 굴메, 군사 요지 군산
  • 영주일보
  • jeju@newslinejeju.com
  • 승인 2020.09.19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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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희주 오롬연구가·JDC오롬메니저
◇새롭게 밝히는 제주오롬 이야기
서남쪽에서 본 골메
▲ 서남쪽에서 본 골메 @뉴스라인제주

골메는 서귀포시 안덕면 창천리 564번지, 해변마을인 대평리, 감산리와 접하고 있다. 오롬의 해발 334.5m, 실제 높이 비고는 280m이다. 오름의 해발과 비고의 차이가 54.5m 인 것은 이 오롬은 해변 오름이기에 큰 차이가 없다. 오롬의 모양은 원추형 ‘라바돔’인데 용암이 분출하다 멈추고 식어져 현무암이 되었다. 그 모양새가 여전히 용암을 닮아서 라바돔(Lavadom. 용암언덕)을 이루고 있다(백록담은 조면암으로 이뤄진 라바돔이다).

골메 정상부에는 두 개의 ‘뿔바위’가 있고 동남사면에는 애기업개 돌(애기를 업은 모양의 돌) 등이 있다. 이 돌들은 퇴적층의 차별침식에 의한 기암괴석으로 알려져 있다. 남사면 계곡에 발달된 웅장한 퇴적층들은 수평의 층리를 이루고 있는데 이는 제주도 최대의 ‘화산쇄설성 퇴적층’으로 도내 오름 중 그 규모나 크기에 있어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골메의 이름은 실로 다양하다. 그러나 본디 난드르大坪里 일대 사람들은 이 오름 일대에 골짜기가 많다하여 '골메 <골뫼'라 불렀다. 이후 변음 되어 '굴메'라 했다는데 ‘굴메’는 제주어로 ‘그림자’라는 말이다. 해질녘이면 북쪽 골메가 난드르에 ‘굴미(제주어:그림자)’가 지니 ‘굴메’라 부른 것이다. 제주에서는 오롬을 뫼나 메, 미라 하기에 굴미나 굴뫼, 굴메가 유사하다.

골메의 일본진지 동굴
▲ 골메의 일본진지 동굴 @뉴스라인제주

고려 목종(제7대왕, 재위/12년, 997~1009) 때 제주도에 화산이 폭발하여 비양도와 골메가 솟아났다고 한다. 고려조정은 박사를 보내어 화산을 조사토록 했는데 박사는 왕에게 ‘상서로울 서瑞’자를 써서 서산瑞山이라고 보고하였다. 이후 그렇게 불리다가 나중에는 그 형상이 군막형태라 하여 ‘군산軍山’이라 불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보다는 제주어 골메>굴뫼가 먼저인데 이를 표기할 때 ‘군뫼’로 듣고 ‘군산軍山’이라고 쓰였을 거라는 게 맞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와서도 여러 명칭이 쓰였는데 『조선강역총도』에는 '굴산屈山', 『탐라순력도』나 『탐라지도병서』에는 '군산軍山, 『해동지도』에는 '군산악軍山岳, 『제주삼읍도총지도』나 『대동여지도』, 『탐라지초본耽羅誌草本』 등에는 ‘호산蠔山’으로 『조선지지자료』에서는 '군산群山으로 『조선지형도』에는 ‘군산軍山’이라고 각각 표기되어 있다.

골메는 여러 가지로 불리나 본디 ①골뫼에서>골메 ②굴메>가 나왔고 이후 역사적으로는 ③군산軍山, 군산악軍山岳, 군산群山, 굴산屈山이라는 표기는 모두 제주어 ‘골메-굴메를 음차한 것이며 ④서산瑞山은 이 오롬의 발생상황을 상서로움으로 보고-만약 나쁘게 말한다면 왕의 치적에 누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⑤호산蠔山‘은 ’골메‘가 해저에서 분화했기에 ‘굴조개 호蠔자’를 써서 ‘조개껍질들이 나타난 것을 증명하며 생성과정’을 표현한 명칭이다.

골메에서 본 서귀포
▲ 골메에서 본 서귀포 @뉴스라인제주

고려초기에는 ‘상서로운 산(서산瑞山)’으로 불리다가 나중에 군산軍山이라고 불렸다면 ‘목호牧胡의난(고려 공민왕 때)’을 진압하기 위해 여명연합군 수장 최영장군이 새별오롬(새성)에 진친 목호들을 격파한다. 고려군들은 목호들을 추격할 때 서귀포 법환리에 마지막 ‘막숙幕宿’을 치기 전에 군사적 요충지였을 이곳에 ‘군막’을 쳤을 것이다-그 이후 일본군, 4.3 때에는 좌익들이 이용했을 것이고-그래서 ‘군산軍山>군뫼>군메’란 명칭이 발생했을 것이다.

최초 본디어 골뫼>골메>는 굴뫼>굴메로 불리다가 고려후기부터 ‘군산’이란 명칭이 쓰였다면 이 같은 역사를 감안 해볼 때 고려 말 최영장군 이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본디어인 ‘골메’로 통일하는 게 옳다고 본다. 골메는 측화산으로 조선시대 봉수가 있었다. 동쪽으로는 구산봉수, 서쪽으로 송악봉수와 교신했다고 알려지나 봉수대 터도 표시도 없다. 제주도에는 봉수대 25개, 연대 38개가 있었으나 표시, 복원, 재현도 없으니 이 또한 제주의 역사와 문화를 무시하는 처사이다. 이점에 대해서는 제주자치도에 건의했으니 기대하는 바이다.

골메를 오르는 길은 세 곳이 있는데 이번에 가다보니 일주서로 상에 감산리 3거리로 들어가게 되었다. 지난 가을 골메를 찾았을 때 오롬은 온통 국화향이 가득하였다. 바위틈에 피어난 감국이 황금빛인데 하얗게 피어난 억새들까지 합하여 탐방하는 길손을 환영하듯 가을바람에 손을 흔든다. 백로를 앞둔 날, 감국과 억새는 피지 않았으나 사방을 바라보니 상쾌하다.

골메에서 본 산방산
▲ 골메에서 본 산방산 @뉴스라인제주

예덕나무는 아직 푸르고 우슬초, 달개비, 삼수새기, 며느리밑씻게가 비탈에 가득하다. 위로 올라갈수록 무릇, 짚신나물, 개요등, 돌콩 등이 보리수를 타고 오른다. 모시풀, 쌍동 등이 다른 곳 보다 많아 보인다. 구지뽕과 소나무, 제주산 고목들이 비탈 아래서부터 보인다. 구멍 나고 속이 빈 나무들이 모진 세월을 말하듯 한데 수리대나무들은 터널을 이루고 있다. 굴메는 봄이 무르익을 즈음 보랏빛 돌무꽃이 능선을 덮을 때가 가장 환상적이다.

골메 탐방로를 조금 더 오르면 좌측에 ‘구시물’이 있다. 그 옛날에는 기우제를 드릴 때 쓰일 만큼 성스럽게 여겼고 아들 점지를 바라는 사람들에겐 소원을 비는 곳이기도 했다. 일본은 대동아전쟁에서 본토를 막는 마지막 보루로 제주 땅 곳곳을 요새화 하였다. 그 때도 모슬포에 공군부대가 있었는데 모슬포가 코앞인 이곳은 당연히 요새화 했을 것이다. 작지만 식수가 있으니 한 두 소대는 주둔했을 것이다. 여기에 10여개의 반공호가 있는데 길이 9m, 폭 1m, 높이 1.7m이다. 당시에는 반공포-고사포들이 모두 하늘을 겨누고 있었을 것이다.

골메 정상에 서면 파노라마처럼 제주 남녘바다가 환히 펼쳐진다. 북쪽으로는 신산오롬, 더데오롬, 우보악, 동쪽으로는 멀리 한라산과 베릿네오롬, 구산봉, 바다로는 강정포구, 서귀포 앞 범섬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남쪽 바다로는 화순 금모래해수욕장, 형제바위, 가파도, 마라도가 보인다. 해질녘이면 산방산, 송악산 너머로 펼쳐지는 환상적인 황혼을 볼 터인데 때를 기다리지 못함이 너무 아쉽다.

골메는 백두산 천지보다 몇 배나 강한 에너지가 나온다고 한다. 이후 직접 체험해 보고 싶다. 난드르大坪里에서 해가 질 때면 북쪽의 오롬은 굴미>굴메(그림자)가 진다. 이제 서럽던 옛날은 덮어버리자. 뜨는 해 보다 지는 해는 더 아름답다 하지 않던가. 화순금모래 해수욕장 너머로 빛나는 남녘바다, 굴메야! 금빛 반짝이는 황혼을 보며 이제는 희망을 노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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