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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태식 칼럼](13)신나는 학교생활
[현태식 칼럼](13)신나는 학교생활
  • 영주일보
  • jeju@newslinejeju.com
  • 승인 2015.04.27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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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태식 전 제주시의회 의장

▲ 현태식 전 제주시의회의장
나는 북초등학교 6학년 2반 42회 졸업생이 되었다. 오현중학교 야간부에 진학하려고 원서를 내었는데 정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그렇게 자식공부에 성의가 별로 관심이 없던 것처럼 보이는 아버지께서 입학원서를 찾아다 제주중학교 주간으로 다닐 수 있도록 해주신 것이다. 이것이 운명의 장난이라면 장난인가, 그 후 제주중학교를 일등으로 졸업하게 된 것이나, 고등학교 진학길이 막힌 것이 또 한번의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중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게 된 것은 참으로 우연한 동기가 있었다.

중2때 4·3사건으로 집이 모두 불타버리고 학교도 중단되었다가 정상보다 2년이나 늦게 학교에 입학한 고향친구가 오른쪽과 왼쪽에 앉아서 공부했는데 시험 때가 되면 나의 시험 답안지를 훔쳐보고 시험을 봤다. 내가 그 친구를 볼 때, 나보다 평소에 성적이 떨어지므로 내 것을 훔쳐 봐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아 내 시험답안지를 보여줬다.

1학기가 끝나고 성적표를 받자마자 한 친구가 내 성적표를 보자는 것이었다. 나는 내 성적표를 보고 예상외로 평균 성적이 낮아 화가 났다. 창피스러웠다. 내 것을 자꾸 보자고 하는 것은 자기의 성적이 나보다 높다고 생각하고 그걸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시험칠 때 자기가 알고 내가 모르는 것은 하나도 말해주지 않았고, 자기가 모르는 것은 죄다 내 것을 훔쳐보고 시험을 치렀다고 생각하니 불쾌하기 그지 없었다. 화가 나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 중에 그 녀석이 내 호주머니에 넣어둔 성적표를 빼내어 가지고 가서 확인해보는 것이 아닌가.

나는 순간적으로 헌 의자 등받이 가로막대를 빼들고 후려쳐 버렸다. 그랬더니 나보다 두 살이나 연상이고 힘이 좋은 이 친구가 자기 허리가 부러졌으니 고발하겠다고 엄포를 놓으며 학교 뒷골목으로 나를 끌고 가서 두들겨 패니 흠씬 매만 맞고 말았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나는 굳은 결심을 하였다. 다음부터는 한 글자도 안 보여준다고 각오하고, 공부도 제대로 하게 되었다. 집에서 아무리 힘든 일을 한 날이라도 저녁마다 한, 두 시간씩 공부를 했다. 2학기 말에는 내 평균 성적이 10점이나 올랐다.

3학년 담임이 새로 바뀌었다. 내 성적표를 보신 모양이었다. 2학년 교실에 가셔서 우리 반에 현태식이란 학생이 있는데 컨닝을 잘하는 불량한 놈이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그 학급에는 마침 초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에서 공부한 적이 있는 고원식이란 친구가 있다가 “현태식이는 초등학교 때 월반한 학생으로 공부를 잘합니다.” 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이런 사연이 있은 후 담임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면서 인정해 주시는 것이었다. 선생님이 인정해주시니 신이 난 나는 더욱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허락이 없어서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부모님과 약속하였다. 일년을 집에서 일하고 다음해에 고등학교에 진학하기로 했다. 그리고는 머슴처럼 일했다. 쟁기로 밭가는 일, 산에 가서 마차로 땔감하여 오는 일, 마·소를 먹이기 위해 꼴을 베어오는 일, 비 오는 날이면 볏짚을 두드로 그것으로 밧줄이나 새끼꼬는 일 등 하루도 그저 노는 날이 없었다.

그러니 한라산 백록담은 나이 50살이 넘어서야 한번 등반해봤고, 제주 사람이면 다 가보는 성산일출봉을 지금도 못올라봤다. 산방산도 젊은 때는 못 가봤고, 산굼부리도 1998년 3월 15일 박물관대학을 수료할 때 탐라문화보존회의 행사에 참여해서 비로소 가보았던 것이다.

밤에 아무리 고달프더라도 공부는 매일 한두 시간씩 했고, 소 먹이러 가는 날엔 영어 단어장을 가지고 가고 오는 길에서 외우곤 했다.

일년이 거의 다 갈 때쯤 고등학교 입시용 모범전과를 완전히 마스터하게 되었다. 그러나 약속한 일년은 다넘어 가는데 진학시켜줄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정말 약속을 안 지키면 ‘초가집 네 귀퉁이에 불을 지르고 나도 마루에 앉아 타 죽어야지’하는 각오와 작심을 단단히 하고 있었다. 남의 집 머슴을 살아도 세경(1년치 급료)을 주는 법인데, 이렇게 죽도록 일을 하였으면 세경 준 셈치고라도 학비를 대어주고 학교에 보내주어야지 학교에 안 보내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마음 속으로 되뇌이고 있었다.

그 해가 다 갈 무렵, 교편을 잡고 있는 큰 형님(민식)이 나에 관해서 부모님께 말씀을 드렸다. “태식이는 중학교를 좋은 성적으로 졸업했는데 진학하지 못하면 애석한 일이니 밥 빌어다 죽을 쑤어 먹더라도 제가 공부시키겠습니다.”고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승낙을 받아서 나를 형님집으로 데려갔다. 형님 밑에서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런데 또 사건이 일어났다. 큰형님은 6·25동란 때 중학교 3학년 학생으로서 체중 미달임에도 불구하고 팬티 속에 납덩이를 매달아 군대에 지원하여 신체검사를 받았다. 훈련을 마치고 전선으로 가기 위하여 함정에 승선하는 데서 체중을 다시 검사해보니, 고된 훈련으로 쇠약해진 몸이라 체중미달로 인해 제대시켜버리고 말았다. 정상적인 군대생활을 못했다는 이유로 사범학교 졸업 후, 교편 생활을 하는 중 다시 징집통지서를 받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부모님 집으로 돌아왔다.

형님이 군사훈련을 받은 것은 사실이고, 2군사령부에 제대자 명부가 있을테니 그를 확인하여 증명이 되면 군대생활을 필한 것이 된다는 정보를 얻고 가서 확인해본 결과 형님은 다시 소집당하지 않게 된 것이다. 제대사실을 확인한 형님은 돌아오셨다. 그런데 형님으로부터는 다시 오라는 말씀이 없어 나는 전전긍긍하며 부모님이 시키시는 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겨울 눈덮인 길을 마차를 끌고 어승생(지금의 한밝수원지) 남쪽 골짜기까지 가서 나무를 베고 싣고 와야 했다. 훗날 이 때 마련해 둔 장작을 팔아서 교과서와 학용품을 살 수 있었다.

봄이 되어 고교 입학시험이 몇 주 앞으로 다가왔을 때 형님이 다시 나를 오라고 부르셨다. 나는 쾌재를 부르며 다시 형님 집으로 들어갔다. 드디어 시험날이 되어 오현고등학교에서 입학시험을 치렀다. 문제지를 받고 보니 아주 쉬었다. 음악이나 미술 문제 말고는 틀린 것이 없어 보였다.

시험 결과가 발표되었는데 내가 2등으로 합격해서 특대생이 된 것이다. 입학금 전액 면제, 수업료는 한 학기를 면제하는 특대생으로 공부하게 되었다. 이 때부터 고행길은 끝없이 이어져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아마도 내 생이 끝나는 날까지 이어질지 모른다.

형님께서는 특대생이 안되면 수업료를 대어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부모님이라면 ‘너무하십니다.’고 항변이라도 해보지만 형님의 배려로 학교 다니는 처지에 단 한마디 가타부타 함이 없이 순종하는 태도로 학교에 다녔다.

형수님이 지어주시는 밥을 먹고, 점심은 거의 거르지만 공부는 전과목 평균 90점이상이어야 특대생 심사대상에 해당된다. 여름엔 찜통 더위에 시달려야 하고, 겨울에는 냉냉한 골방에서 형수님이 시집 올 때 가져 온 얅은 요와 이불을 깔고 덮었다. 추위에 아무리 떨어도 춥다 소리도 못하고 지냈다. 몸은 부지불식간에 고사(골병)하고 있는 것이다.

호야 끼운 남포불(등잔)에서 공부하니 끄름이 심해 기관지가 나빠지고, 각기병과 허리병이 생겼다. 아프더라도 특대생은 꼭 되어야 하는데, 성적만 가지고 되는게 아니라 품행이 단정해야 한다. 교직원 회의에서 전원 찬성해줘야 특대생으로 결정된다. 그러니 선생님 어느 분의 눈에라도 거살리면 안되었다. 조용하게 있는지 없는지 모르게 행동하고, 하고 싶은 말도 목청 높여 하면 안 되었다. 죽은 듯이 3년을 지내 놓고 보니 성격이 완전히 변했고, 기가 죽고 용기가 없어 남들 앞에 나서지도 못하게 되었다.

청소년기에 호연지를 길러주는 게 교육의 중요한 목표이기도 한데, 나는 오히려 무서운 자폐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불치의 병이 생긴 것도 모르고 3학년 1학기 까지는 용케 특대생으로 대우받으며 지내왔는데 3학년 2학기가 되어 절망스러운 일이 생기고 불치의 병을 수도 없이 더 얻게 되었다. 알아도 별 수 없긴 했지만, 여하튼 그간의 중노동과 정신적 고통, 공부에 대한 중압감에 시달리며 3년을 거의 점심은 굶었으니 체력이 한계에 다다르게 된 것이었다. 집에서도 초저녁부터 졸고 학교에서도 졸았다. 형님은 내가 공부에 태만하다며 졸음 쫓는 ‘카페나’란 약을 먹으라고 주시는 것이었다.

그 약을 먹으니 처음에는 정말 정신이 맑았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뿐이었고 나중에는 기억력이 현저히 떨어져 책장을 넘기면 무엇을 읽었는지 모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약때문인 줄 모르고 정신집중을 아니해서 그러려니 했다. 그러는 중에 2학기를 맞이했는데 어떻게 된 셈인지 특대생 제도를 학교에서 폐지시켜 버렸다.

특대생 제도가 폐지되어서 나는 반년 분 수업료, 팔천환씩 두 번을 납부해야 졸업장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나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학교에서는 수업료를 가져오지 않으면 퇴학시킨다며 독촉했다. 어머님께 사정을 말했더니 ‘형에게 맡겼는데 무슨 말을 하느냐’였다.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말해도 그 때 그 심정,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내 비통한 마을을 알지 못하리라.

몇 달 동안 눈물로 학교와 집을 오갔더니 머릿 속이 깨지게 아프고 불면증이 심해지고, 허리통증, 좌골신경통에 관절이 아프고 위와 장이 나빠지고 축농증이 생겨 코가 막히고, 기관지, 폐, 심장, 간이 나빠지는 등 내 몸은 질병 백화점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젊은 스무살 때라 자리하고 눕지는 아니했다. 돈이 좀 있어서 따뜻한 간호만 있었더라면 회복이 되었으련만 방치해 뒀으니 오늘날에도 이 증상은 온존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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