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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청비](60) 해탈의 문
[자청비](60) 해탈의 문
  • 김순신
  • news@newslinejeju.com
  • 승인 2022.05.19 07: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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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신 제주수필문학회 회장
김순신 제주수필문학회장
▲ 김순신 제주수필문학회장 ⓒ뉴스라인제주

긴 계단을 헉헉 거리며 오르다 보니 ‘해탈의 문’이라는 팻말이 보였다. 조금 아래에서는 ‘등용문’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해탈의 문’이다. 부처의 길을 위해 부단히 수양하는 이 절 스님들은 이미 해탈의 문턱을 넘었을까? 아직도 그 문턱을 넘나들고 있을까. 해탈이라는 것이 시험문제를 풀 듯이 아는 지식이나 실력, 능력으로 되는 것이면 나도 도전해 볼 텐데, 멀고 높은 곳에 있는 구름 같은 것이라 감히 엄두가 안 난다.

해탈의 경지에 이르면 모든 번뇌가 살아지니 마음이 호수처럼 고요하다고 한다. 울렁거림이 없고 흔들림이 없고 본래의 생명체 그 자체다. 명상이나 기도, 묵언 수행 등도 어쩌면 마음의 번민을 없애고자 하는 방법일 수 있다. 누구나 원하지만, 누구도 잘 이를 수 없는 경지이다.

예수님도 십자가에 매달리기까지 모진 수난을 겪으면서 많은 기도를 했다. 그 기도 속에 예수님의 번뇌가 담긴 고백이 있었다. “하느님,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라고 말이다.

마음의 평화를 얻고자 성당을 찾아 기도하지만, 성체를 받아 모시는 순간에도 머릿속은 숫자와 문자, 소리와 색깔들로 꽉 차 있을 때가 많다. 어느 날은 숫자들이 뛰놀며 골치를 때리고, 어떤 때는 수다 떨던 소리가 다시 찾아와 귓가에서 맴돌고, 때로는 원고의 활자들이 춤을 추며 나를 놀리기도 한다.

그러다가도 어느 순간, 세상 모두가 평화로워 보이고 나 자신이 소중한 존재 그 자체로 보일 때가 있다. 그런 순간들은 은총의 시간이다. 그리고 그게 행복의 시간으로 채워진다.

저 문을 통과하는 순간 내 안에 거머리처럼 달라붙은 온갖 번뇌를 떨쳐 버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한 걸음씩 가까이 다가갔다. 해탈의 문은 어마어마한 넓적 바위가 양옆으로 길게 세워진 좁은 통로였다. 조물주의 힘이 바위에 머무는 듯했다. 마음을 가다듬고 천천히 한 걸음씩 좁은 틈새를 지나왔다. 양쪽에서 벽이 된 바위가 ‘너는 점수 미달, 불합격~!’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불합격, 그 소리가 기분 나쁘지 않았다. 나 자신을 알기 때문이다.

해탈의 문을 통과하고 나니 지나온 숱한 문들이 뒤에서 줄줄이 보였다. 어머니의 좁은 자궁의 문을 열고 나온 이후 입학의 문, 시험의 문, 졸업의 문을 통과하고 취업의 문을 무사히 넘기고, 긴 시간이 흘러 정년퇴직의 문까지 통과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과거에는 그 문들이 지금처럼 좁은 문이 아니어서 가능했던 것도 있다. 문이 좁아서 겨우 통과한 때도 있었지만 지금의 상황보다는 나았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취업은 바늘구멍만큼이나 좁고 통과하기가 어렵다. 결혼은 어떤가, 겨우 결혼의 문을 통과해도 내 집 마련을 위해 다시 좁은 문을 통과해야 한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라는 성경 구절은 무엇이든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없음을 의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탄생부터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좁은 문에서 나왔다. 그만큼의 고통이 따라야 무엇이든 얻어지는 것이다. 세상살이가 쭉쭉 빵빵하면 좋으련만 그렇지 않다. 고추 맛처럼 맵다고 하지 않았나. 인생의 매운맛을 견뎌내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 노력하는 것이 젊은이들에게는 해탈의 방법일 수 있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너 해탈 했냐?”이라고 묻는 경우가 있다. 이 말은 너답지 않다는 뜻이다. 성숙한 반응에 대한 칭찬일 수도 있고 ‘너답게 그냥 살아’라는 뜻일 수도 있다.

나름 어떤 상황일지라도 평정심을 찾으려고 하는 편인데, 마음과 뜻대로 되지 않아 혼탁해지는 자신을 본다. 눈으로 보이는 것, 입으로 들어오는 것, 귀로 들어오는 소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해탈은 점수 미달이고 불합격이 맞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아는 것, 즉 참 자아를 발견하는 것이 해탈의 길이라고 했다. 장자는 ‘완벽한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거울처럼 부린다. 그 어떤 것도 붙잡거나 거부하지 않는다. 그 마음은 응하지만, 소유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내 마음 상태를 거부하지 않되 그대로 바라봐 주는 것, 이것이 바로 나를 객관화하는 것이다. 마음에 달라붙는 불안, 걱정, 분노, 기대, 그리움, 우울 등을 있는 그대로 지긋이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하는데, 억지로 떼어내려 한다. 그러다 보면 안절부절못하게 되고, 분노의 화살이 튀어 오르기도 한다.

번뇌와 망상이 없이 지극히 청정한 의식의 상태 도대체 그런 상태가 가능하기나 할까?

옛말에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고 했지만, 자꾸 쳐다보다 보면 오를 방도를 찾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좁은 바위틈을 돌아 돌아 올라간 곳은 여수 향일암 한 칸짜리 부처님 방이다. 고개 숙여 부끄러움을 고백했다. 부처상이 자비로운 예수님 모습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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