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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청비](57) 삶의 향기
[자청비](57) 삶의 향기
  • 이을순
  • news@newslinejeju.com
  • 승인 2022.04.28 09:3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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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을순 소설가
이을순 소설가
▲ 이을순 소설가 ⓒ뉴스라인제주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다. 이런 화창한 날씨엔 참기름 짜기에 안성맞춤이다. 볕이 쨍쨍할 때 기름을 짜야 그 양도 더 나오기 때문이다. 나는 서둘러 작년에 남편이 참깨 농사를 지어 먹다 남은 깨를 꺼낸다. 그러고는 그걸 한번 씻은 후, 볕이 아주 잘 드는 곳에 돗자리를 펼쳐 놓곤 널어둔다. 오후 2시쯤 되자 참깨가 보슬보슬 잘 말라 있었다.

남편이랑 동네 기름집 떡방앗간으로 갔다. 한산한 가게에서 기름을 짜는 걸 구경하고 있는데, 삼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큰 대야를 들고 온다. 둥글게 말린 삶은 쑥 뭉치들이 대야 안에 가득 들어 있다. 그녀는 쌀 10kg과 설탕을 별도로 갖고 와 쑥과 함께 갈고 반죽까지 해달란다. 호기심이 발동한 내가 어떻게 떡을 해 먹느냐고 묻지 않을 수가 없다. 그녀는 반죽한 것을 여러 개로 등분하여 냉동실에 보관했다가 아이들이 먹고 싶다고 할 때마다 개떡을 만들어서 먹는다고 한다. 무엇보다 쑥이 듬뿍 들어가서 향과 맛이 좋고 더욱이 건강에도 좋으니 가족들이 모두 좋아한단다. 문득 며칠 전, 떡을 파는 가게 매대에 놓인 여러 종류의 떡들이 떠오른다. 그중 쑥개떡은 보지 못한 듯했다. 그래서인지 은근히 입맛이 더 당긴다. 내가 이 많은 쑥을 어디에서 뜯었냐고 묻자, 그녀는 이틀 동안 해안가 근처에서 뜯었다고 대답한다. 참으로 부지런하고 알뜰한 살림꾼이다. 그 모습이 참 예뻐 보여 나도 그녀처럼 흉내를 내고 싶어진다. 그래서 남편에게 올봄은 이미 늦었고, 내년 봄에는 저처럼 꼭 쑥개떡을 만들어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런데 해가 질 무렵, 밭에 간 줄 알았던 남편이 난데없이 커다란 소쿠리를 들고 온다. 그 안에는 쑥이 한가득 담겨 있다. 반사적으로 내 얼굴이 찡그려진다. 대체 이걸 뭐 하려고 뜯어왔냐고 짜증을 내자, 남편은 이왕 말이 나온 김에 내년이 아닌 내일 당장 쑥개떡을 만들라고 한다. 하지만 남편이 해온 쑥은 그녀의 쑥과는 전혀 달랐다. 밭 근처에 키가 쑥쑥 자란 쑥들을 무더기로 싹둑싹둑 가위로 잘라 온 것이었다. 덤불처럼 수북이 쌓인 쑥을 손질하려면 시간도 꽤 걸린다. 이런 불편한 심기도 모르고 남편은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자랑스럽게 말한다. “쑥이 이만큼이면 충분하겠지? 더 필요하면 말만 해. 더 해올 수 있으니까.” 그 말에 어떤 불만도 표출할 수가 없다. 내가 먼저 쑥개떡을 해 먹고 싶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어쩔 수 없이 키가 큰 쑥에서 여린 잎만 골라 다듬었다. 그렇게 쑥을 다 손질하고 보니 버리는 게 절반도 넘는다. 쌀 한 말에 들어갈 쑥이 어쩐지 부족할 듯싶어 남편에게 쑥을 더 해오라고 했다.

다음날 오전, 남편은 어제만큼 쑥을 해와서 내게 내민다. 그제야 쑥개떡 말을 꺼낸 걸 몹시 후회했다. 그렇다고 하던 일을 멈출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한숨을 푹푹 내쉬며 한참 동안 쑥을 손질하고 다듬어 깨끗이 씻고는 곧장 떡방앗간으로 달려갔다. 떡집 주인아저씨는 삶은 쑥보다 생 쑥을 넣는 게 떡의 빛깔이 더 진해서 좋다고 한 것이다. 물론 처음 마음 같아선 그녀처럼 반죽까지만 만들어 냉동실에 보관했다가 떡을 만들어 먹고 싶었다. 하지만 많은 양의 쑥을 다듬다 보니 이제 그 일이 지루하고 성가시고 귀찮아진다. 그래서 아예 완제품인 쑥개떡을 만들어달라고 주문한다. 떡을 냉동실에 보관했다가 꺼내서 먹기 좋게 작은 용기에 담아 소포장을 해달라는 말도 덧붙인다.

저녁 무렵에야 쑥개떡이 다 되었다고 전화 연락이 온다. 내가 손수 다듬어 갖고 간 쑥의 빛깔과 그 맛이 어떨지 몹시 궁금하여 한달음에 달려갔다. 사각 모양에 꽃무늬가 박힌 떡의 총 개수는 무려 136개다. 그것들은 다섯 개가 한 묶음이 되어 일회용 납작한 종이 용기에 담겨 소포장이 되어 있다. 쑥이 어찌나 많이 들어갔는지 그 빛깔이 아주 짙은 초록색이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쑥개떡을 부엌 바닥에 쫙 깔아놓곤 사진부터 찍었다. 그 사진을 딸에게 보내자 곧장 전화가 걸려온다. “와, 우리 엄마 정말 부지런하네. 쑥이 굉장히 많이 들어갔나 봐, 맛있어 보여. 우리 남편과 아들도 쑥개떡을 무지무지 좋아하는데. 엄마, 나중에 제주에 내려가면 그 떡 먹을 수 있는 거지?” 딸의 큰 호응을 받자 쑥을 다듬던 그 수고스러움이 한꺼번에 싹 가시면서 기분도 덩달아 좋아진다. 그래서 앞으로는 연례행사처럼 쑥개떡을 만들어 가족들에게 봄날의 향기를 느낄 수 있도록 해주고 싶어진다. 따사로운 햇살 아래서 향긋한 쑥 향기를 맡으며, 쑥을 담뿍 뜯을 수 있는 인생이야말로 풍요롭고도 아름다운 삶이 아닐까.

어제 떡방앗간에서 만난 그녀 덕에 오랜만에 나의 일상에도 그윽한 삶의 향기가 물씬 묻어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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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두빛 2022-04-28 21:08:14
문득 쑥개떡이 먹고싶어지는 글이네요.
시간이 흘렀어도 추억과 함께하는 음식은
언제나 그리운 맛으로 되돌아옵니다.
저도 내년엔 쑥개떡을 장만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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