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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청비](49) 차 한 잔의 여유
[자청비](49) 차 한 잔의 여유
  • 이을순
  • news@newslinejeju.com
  • 승인 2022.03.03 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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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을순 소설가
이을순 소설가
▲ 이을순 소설가 ⓒ뉴스라인제주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건 역시 차 한잔 마실 수 있는 여유가 아닐까 싶다. 오랜만에 마음 자세를 바르게 하곤 찻잔에 엷은 녹색의 차를 따라 마셔본다. 입안에 감도는 녹차에서 풍려한 맛과 향기가 묻어난다. 언뜻언뜻 과거의 자신과 오늘의 자신이 스치고 지나간다. 지나온 길은 언제나 미련이 남기 마련이다. 하지만 인생 후반에선 미련이나 집착을 마음에서 내려놓아야 한다. 자기 결정권을 갖고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고 있는가에 따라 자신도 변해야 하니까. 나는 얼마 전, 미련이 남아 있던 지난 인연을 용기를 내어 마음에서 내려놓게 되었다. 이미 유효기간이 끝난 인연을 붙잡고 있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정녕 소중히 여겨야 할 사람은 지금 내 곁에 있는 인연들이다. 노년에 서로 마음을 주고받으며 허심탄회하게 속을 털 수 있는 관계야말로 인생 후반을 함께 해야 할 진정한 벗이리라. 세상을 살다가 보면 자신이 베푼 호의가 상대에게 의무처럼 되어버릴 수가 있다. 아니면 일방적인 호의가 상대에게 심적 부담을 줄 수도 있다. 그러니 인간관계는 참으로 어렵고도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때로는 상대의 말과 행동에서 뒤가 켕기는 듯한 찝찝함과 불쾌감이 남기라도 하면 그 친밀한 관계는 반드시 끊어지게 된다. 떠나는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만약 그걸 알면서도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만난다면 상대는 자신을 만만한 호구로 여길 게 분명하다. 그러니 인연이 아니다 싶을 땐 과감히 관계를 정리하는 것도 자신을 위하는 일이기도 하다. 하여, 이런 문제로 고심하던 나는 마침내 과거의 인연을 정리했다. 그리고 그런 내게 격려가 담긴 칭찬의 말 한마디를 해줬다. ‘괜찮아, 정말 잘했어. 넌 그 인연에 최선을 다한 거야.’

향긋한 차 맛이 혀끝에서 맴돈다. 차를 혼자 마시면 탈속하고, 두 사람이면 한적하여 좋고, 서너 명이면 즐기고, 대여섯 명이면 들뜨며, 일고여덟 명이면 베풀고, 그것을 넘으면 또한 잡스럽다고 한다. 요즘처럼 코로나19 시대에 이렇게 홀로 차를 마시며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도 과히 나쁘진 않다. 창밖으로 보이는 홍매화와 영춘화가 활짝 피어 있다. 앞마당에 있는 온갖 꽃들과 식물들도 분주하게 봄맞이를 서두르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다. 자연은 자기 나름의 특성을 갖고 있다. 사람도 자신 나름의 얼굴을 만들며 세상을 살아간다. 인생을 살다가 보면 자기의 꿈과 목표가 현실의 삶에 따라 변한다. 특히 노년에 들어서면 더더욱 그렇다. 늙어갈수록 자신이 처한 현실의 윤곽이 잘 드러나는 법이니까. 사실 나도 인생 후반을 농부의 아내로 살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예전에는 농작물을 수확할 때면 그 일이 너무 힘들고 귀찮아 무척이나 짜증이 났다. 하지만 그 일이 생활에 보탬이 되자 생각이 달라졌다. 생각이 달라지자 마음 또한 변했다. 주어진 일을 긍정적인 마음으로 묵묵히 일하다가 보니 어느새 나도 모르게 척척 일을 해내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농사로는 돈을 많이 벌진 못한다. 그러나 노후의 소일거리로는 그래도 괜찮은 편이다. 우선은 종잣돈을 만들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가 있다. 또 그런 돈으로 재테크에 투자하면서 삶을 보다 구체적으로 계획할 수도 있다. 남편은 우리의 노후가 더 편안하고 안전하게 지낼 수 있도록 삶의 터전을 마련하겠다고 한다. 그게 목표라서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열심히 농사를 짓겠다는 것이다. 이런 남편의 굳건한 의지 때문에 과거 편견과 오만으로 가득했던 내 마음을 말끔히 비워낼 수 있었다.

근면하고 성실한 남편은 오늘도 자기만의 철학과 목표를 갖고 밭을 일구고 있다. 하루의 일과가 끝나면 그날 일을 빠뜨리지 않고 농지일지에 쓰는 것도 거의 습관처럼 되어버렸다. 또 농사에 들어가는 모든 지출과 수입 또한 꼼꼼하게 정리해둔다. 그 덕분인지 올겨울 쪽파 농사는 풍작을 이루었다. 주변 밭 쪽파들은 매서운 추위로 인해 쪽파가 땅속에 묻혀 제대로 수확하지 못했는데, 남편이 재배한 쪽파는 튼실하게 잘 버텨줘서 수확이 끝나는 날까지 좋은 상품상태를 유지했다.

농사란 부지런히 일만 한다고 해서 성공하는 게 아니라는 걸 나는 요즘 남편을 통해 배우게 된다. ‘성공에는 방법이 있고 그 방법은 생각의 길에서 나온다.’ 사마천은 이를 ‘사로(思路)’라고 했다. ‘생각의 길이 달라 지면 내가 달라지고, 내가 달라지면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세상의 길이 달라 보이면 나아가 인생의 길이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사마천은 배우기를 좋아하되 깊게 생각해야 마음으로 그 뜻을 알게 된다고 했다. 농사일도 이와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하늘은 노력하는 자를 절대 외면하지 않는다는 말을 나는 굳게 믿는다. 준비된 자에겐 반드시 그 기회가 찾아오는 법이다. 쪽파 작업을 모두 끝낸 이 시간, 나는 차 한 잔의 여유를 즐기며 따뜻한 봄날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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