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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청비](37) 내게 준 특별한 선물
[자청비](37) 내게 준 특별한 선물
  • 이을순
  • news@newslinejeju.com
  • 승인 2021.12.09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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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을순 소설가
이을순 소설가
▲ 이을순 소설가 ⓒ뉴스라인제주

창가에 기대어 겨울나무를 바라본다. 앙상한 나뭇가지가 쓸쓸함만 더해준다. 시간은 어느새 12월의 끝자락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세월은 이렇게 빨리 흘러간다. 문득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어진다. 마침 육지에 오랫동안 묵혀뒀던 땅이 있어 나는 그걸 핑계 삼아 가족들에게 여행을 떠나자고 말해본다.

우리 부부와 아들 내외는 제주 공항을 출발해 김해공항에 도착한다. 우선 경남 창녕군 남지읍 칠현리 마을부터 찾는다. 88년도에 내가 산 땅이 그곳에 있다. 낙동강이 근처에 있는 한적한 작은 시골 마을. 당시 나는 주어진 삶을 살아간다기보다는 왜 사는가에 강한 의문을 품었다. 그놈의 역마살이 들었는지 자꾸 밖으로만 나돌아다녔다. 그러다가 훗날 나를 위한 암자를 지어보겠다는 포부를 갖고 그만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남편 몰래 쌈짓돈을 탈탈 털어 큰언니가 다른 사람한테 팔겠다는 토지를 냉큼 사버린 것이었다.

흉물스럽게 남아 있는 폐가가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내가 왜 그토록 방황했을까? 왜 좀 더 날 사랑해주지 못했을까? 내 안의 나를 제대로 치유해 줬더라면 결코 이런 곳에 땅을 살 이유는 없었을 터, 아쉬움만 남는다. 남편은 내년 3월에 다시 와서 폐가를 철거하고 주변을 깨끗이 정리한 후 부동산에 내놓겠다고 한다. 우리는 근처 언덕 논둑에 올라가 낙동강을 바라본다. 어디선가 잿빛 승복을 입은 비구니 스님이 내게 다가와 말을 걸어올 것만 같다.

밀양에 도착하자 절로 영화 ‘밀양’이 떠오른다. 그 때문에 작은 도시의 거리가 그리 낯설지가 않게 느껴진다. 코로나 때문인지 재래시장은 매우 한산하다. 방송에서 소개한 맛집이 그 시장 안에 있다기에 일부러 찾은 곳이다. 밀양에서 첫날밤을 묵은 우리는 다음 날, 얼음골 케이블카를 탔다. 영남의 알프스는 “하늘과 구름, 꿈이 있는 하늘정원”이라고 소개하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온다. 내가 마치 비현실적인 세상으로 떠나는 듯한 기분이다. 특히 녹산대 전망대에서 바라본 ‘백호 바위’가 매우 인상적이다. 힘찬 호랑이의 신비한 기운이 강하게 뿜어져 나와 내게 스며들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밀양에서 빠져나온 우리는 언양에서 코다리찜으로 점심을 먹은 후 곧장 부산으로 달려갔다. 국제시장과 남포동 거리를 한 바퀴 둘러본 후 이내 용두산 공원으로 가본다. 여고 시절 수학여행 때 한번 찾은 적이 있는 추억의 용두산 공원이 그리워서다. 물론 그때와는 영 딴판으로 변해 있지만 뒤늦게라도 그 흔적을 밟아보니 마음이 흐뭇해진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기울자 서둘러 자갈치 시장으로 향한다. 큰언니가 그 시장에서 꼼장어와 장어집을 하고 있어 오랜만에 언니의 얼굴도 볼 겸 저녁 식사도 할 겸해서 찾아간다. 언니는 갑작스럽게 나타난 우리를 보고 깜짝 놀라며 반색을 한다. 그러곤 내게 던진 첫마디가 ‘막내도 이젠 많이 늙었구나’였다. 아, 어쩌랴. 세월의 흐름에 주름살만 깊어가는걸. 이제 큰언니와 내가 친구처럼 함께 늙어가고 있었다.

그날 남포동 숙소에서 하룻밤 지내고, 다음날 해동 용궁사를 찾았다. 해동 용궁사는 우리나라 4대 관음성지의 하나이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이란다. 아들과 며느리는 부산 올 때면 이곳 절집을 꼭 찾는다고 한다. 파란 하늘과 청록빛 바다의 풍광이 더없이 아름답다. 불현듯 강원도 낙산사가 떠오른다. 나 홀로 홍련암에서 철야 기도한 적이 있었다. 그 시절만 떠올리면 지금도 내가 ‘꿈속에서 나비가 되다’라는 장자의 글이 생각난다. 나 또한 한창 소설에 몰두할 때 그게 현실 같았고, 현실이 비현실 같았다. ‘꿈속에서 나비가 된 것인지, 꿈속에서 내가 있는 것인지’ 정말 헷갈렸기 때문이다. 장자가 말하는 초월적 존재란 무엇일까? 인간을 만물과 동등하게 세상에 내던지고 생성 변화시키며 천지 우주의 자유로운 작용이 곧 자연의 ‘도’라 했던가. 살아 있는 혼돈과 하나가 되고, 살아 있는 혼돈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이 바로 장자가 말하는 해탈이라는데, 무지한 나로서는 도무지 그런 자연의 이치를 알 도리가 없으니 그저 마음만 답답할 뿐. 그렇다면 인간에게 있어 이상적인 삶이란 어떤 것일까? 사방에서 ‘관세음보살’ 염불 소리가 흘러나온다.

‘오륙도 스카이 워크’에는 두꺼운 투명유리가 바닥에 깔려있다. 까마득히 내려다보이는 시퍼런 바다가 순식간에 공포감으로 다가온다. 불쑥 ‘오징어 게임’의 한 장면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유리 바닥에 발을 디딜 때마다 심장이 긴장감으로 바짝 오그라든다. 하지만 그 끝에 가보니 시원하게 펼쳐진 푸른 바다 양옆으로 오륙도와 해운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어, 황령산 전망대를 마지막으로 구경하곤 김해공항으로 발길을 돌린다. 여행이란 돌아갈 수 있는 집이 있기에 더 즐거운 것이리라. 이번 여행은 가족들이 내게 준 특별한 선물 같았다. 이제야 홀가분하게 한 해를 잘 마무리하고, 새해를 감사한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을 것만 같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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