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순진의 시의 정원](18) 혈액이 흐르는 외투

이대흠 시인

2020-06-19     양순진
이대흠

혈액이 흐르는 외투

이대흠

언제 밥 한번 먹자라는 말의 순도는 친밀도와 비례합니다 공식입니다만 공식적인 것엔 도금된 경우가 많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가까이 사는 나무의 잎들은 빈번히 접촉하지만 서로의 영양분을 공유하지는 않습니다

틈 될 때 커피 한 잔 하자는 말보다는 언제 잠깐 몸 좀 빌려 쓰자고 하는 게 낫습니다 택배차량에서 잠시 만났다 헤어지는 화물들처럼 우리는 만나고 이별합니다 몸만 사용하는게 가능하지 않다면 감정은 혈액이 흐르는 외투일 것입니다 감정을 벗고 만 날까요 어떤 경우에도 감정을 전당포에 맡기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가슴 뛰는 설렘 속에는 이미 괴로움이 발생했습니다 그림자는 향기를 복사하지 못합니다 마음은 바빠서 몇 생을 후딱 딴 살림 차렸다가 돌아오기도 합니다 시소의 양 끝에 놓인 듯 오르내리는 감정들을 바라봅니다

 

양순진

언제 밥 한번 먹자. 그런 여운 있는 말 들어본 적 언제인가. 틈 될 때 커피 한 잔 하자. 그런 따뜻한 말 건넨 적 언제인가.

밀랍되어 가는 감정. 온기를 잃어버린 인간 관계들. 감정을 벗고 만날까요, 그렇게 우리는 택배차량에서 잠시 만났다 헤어지는 화물들처럼 숱한 이별의 감정선 넘어 차가운 혈액으로만 흐른다.

시소의 양끝에 놓여져 오르내리는 감정만 계산하고 측정하다 후딱 몇 생이 지나버렸다. 금 간 마음, 엇갈린 관계는 더이상 꽃피기 어렵다. 화무십일홍, 그 찰나를 회억한다는 것은 이미 레일을 벗어난 기차처럼 공허하다.

'가슴 뛰는 설렘 속에는 이미 괴로움이 발생했습니다'라는 시인의 마음은 한용운이 <님의 침묵>에서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라는 마음과 상통한다. 고로 사랑은 이별을 전제로 스며드는 향기 없는 그림자다. 오르락 내리락 롤러코스터 같은 어지러운 감정의 소굴에서 헤매다 종국엔 괴로움과 결별을 맛보게 되는...

도금된 사랑의 구속보다는 차라리 홀로 직립하는 감정의 해방을 맞이하자. 코로나로 발생한 '거리감 유지'는 사랑에도 아주 합당한 처사!

요즘은 사랑보다 진정 사람이 그립다. 거기 마스크 낀 눈사람, 안녕하신가요? [양순진 시인]